[130401] [아야미키] 무제

 

 

 분노 섞인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 속에 바짝 박혀져 있던 긴장이 전율을 타고 사르르 풀어지자마자 눈 밖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다 짜증나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까의 일에 대해서 기분이 영 아니었다. 도대체가, 내가 전생에 무언 악행을 저질렀길래 하필이면 그 미친놈에게 걸린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난 분명 내 나름대로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내 삶에 쓸데없이 개입을 하려 애쓰는―아니 이미 저질러버린 망할 녀석. 마음같아서는 그 짜증나는 놈의 머리를 향해 묵직한 화승총의 총구를 대고 겨누어 주고 싶지만 지금까지 계속 그 충동의 무리를 수십번, 수백번 참았으니 앞으로도 참아야 한다. 입술을 꽉 깨물고 그 속에서 붉은 피들이 솟아오르는 한이 있더라도 참아야 한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배운대로 참아야만 했다. 그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아까처럼 내 온몸 구석구석을 희롱하고 농락해도 어쩌겠는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지. 짜증났다.

 걷는것이 조금 힘들었다. 아마도 방금 전만 해도 긴장을 늦추지 않아 경직되어 있던 다리에 힘이 쫙 풀려버려서일까. 나는 거의 우는 얼굴을 하고 힘겹게 건물의 벽을 손바닥으로 짚고 절름발이처럼 걸어갈 수 밖에 없았다. 한 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어느정도 걸어갔을 때, 방금까지 내가 들어가 있었던―고통의 시작점인 교실의 미닫이문이 부드럽게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어렴풋이 들려왔다. 또 그것에 흠칫하여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안 지나 입술도 파르르 떨렸다. 오래 되어 끼익거리는 나무판자 복도 위를 누군가 뚜벅뚜벅하는 소리와 함께 걸어온다. 그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기랄. 한기가 몸에 서려온다. 

 

 "미키에몬!"

 "히, 히익!"

 

 위축되어 있음이 확연히 실감나는 등을 누군가 살짝 쳤다. 두 번째로 느끼는 무서운 그의 손길이었다.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창피함인지, 아니면 배신감인지 어쨌던 겁이 났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짧은 신음 아닌 신음을 토해내니 그도 이상함을 느꼈는가 어느새 내 어깨를 잡고 내 상체를 자신 쪽으로 돌리려고 하는 그 녀석의 손힘을 어떻게던 이기려고 죽을 힘을 다해 겨드랑이 쪽에 힘을 팍 줬다.  

 그 징그러운 얼굴따위 보고싶지 않단 말이다. 지금 내 팔에 닿아 있는 이 까칠까칠한 손은 아까만 해도 어두운 교실 속에서 내 상의 속으로, 내 양옆 뺨으로, 내 허벅지로, 그리고…… 생각하기 싫었다. 끔찍했던 암흑 속 유린. 그 치욕들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저리 가! 개자식이, 어딜."

 

 팔을 세게 내차고 숨을 헐떡이며 그의 손길에서 도망쳐 나왔다. 딱히 눈을 부릅뜨려고 노력한건 아니지만 몸도 내 마음을 잘 이해하는지 저절로 그런 모양이 만들어졌다. 여전히 평소의 저 무표정을 지키고 있는 키하치로의 얼굴을 바라보니 또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바보같아, 떨궈진 고개와 함께 눈시울이 뜨겁다. 내가 왜 이딴 놈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건지 모르겠단 말이다. 차렷 자세로 가지런히 놓여진 팔이 바르르 떨린다. 눈물을 내보내기 싫어 주먹을 쥐어 보였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나 봐."

 평소다운 명령조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온다. 내가 미쳤냐, 네 말을 듣게? 목구멍까지 차오른 이 말이 서러워 끓어오르는 감정을 꿀꺽 삼킨다. 

 

 "……야."

 계속 이어지는 부름. 그냥 당장 이 곳을 박차고 도망칠까, 하는 생각이 뇌 속을 바쁘게 헤엄치고 있었다. 이젠 꼭 쥔 주먹마저 떨린다. 이 미친놈은 내가 불쌍해서라도 당장 꺼져줘야 할 텐데, 뭐가 그리 잘났다고 내 앞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걸까? 일 초가 아깝게 얼른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서 이 놈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 버리고팠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나의 자멸을 막을 수만 있을 것 같았다. 나, 할 거 많은데. 여쭤볼 게 있다는 핑계로 쇼세이씨께 오늘 뵈러 간다고 말씀드렸는데. 숙제는 또 어떡하지? 그냥 현실을 피해버리잔 생각에 눈을 꼭 감았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부드러운 천이 입술에 닿았다.

 

 "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질적인 물건이 내 입술에 닿았기에 깜짝 놀라 상반신을 움찔거렸다. 붉어진 눈가로 키하치로를 바라보니 그는 어느새 작은 손수건을 꺼내 한쪽 팔로 내 입술을 닦고 있었다. 그 때야 나는 깨달았다. 방금 깨문 아랫입술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는 것을.

 

 "뭐, 뭐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

 

 어이가 없어 한 마디 내뱉자 그는 여전히 표정이 바뀌지 않은 채 무색의 손수건으로 내 입술을 톡톡 치며 피를 닦아낸다. 어딘가에 머리를 쾅, 하고 얻어맞은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곧 어금니 쪽에서부터 바들바들 떨린다. 분노와, 수치심과. 또 뭔지 알 지 못하는 감정들. 뱃 속에서 무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참을수가 없어 이미 눈가에는 눈물이 맺힘을 넘어 입술의 피처럼 주르르 흐른다.  

 진짜 싫어, 이 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