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14.05.04 [140301] [청흑] 2인 합작 청흑
  2. 2014.05.04 [140131] [쿠로코 테츠야] 쿠로코 생일 축전 합작 글
  3. 2014.05.04 [130128] [아베미하] To. 레몬
  4. 2014.05.04 [130113] [로스알바] To. 핀언니
  5. 2014.05.04 [131028] [닌타마 란타로 2학년] 겨울의 유토피아 (미완성)
  6. 2014.05.04 [131027] [쿤밤] 낙서
  7. 2014.05.04 [130821] [로스알바] To.핀언니
  8. 2014.05.04 [로지사콘] [130814] 너에게 마지막
  9. 2014.05.04 [130726] [사부로지&사콘] 졸업 이후 낙서
  10. 2014.05.04 [130717] [로지사콘] 무제

[140301] [청흑] 2인 합작 청흑

 

 

  널어 두었던 청바지를 빨랫대에서 걷고 나서야 어제 세탁기에 여러 옷가지를 한꺼번에 넣어 빨래한 것을 후회했다처음 샀을 때의 치수가 몇이었는지 가늠조차   없을 만큼 잔뜩 늘어난 바지가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펄렁거렸다. 이걸 과연 입을 수는 있을까, 싫증이  나는 그것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만약 어제 네가  집에 있었더라면 잔뜩 뒤엉킨 세탁물들을 세탁기 안에 한꺼번에 집어넣으려 하는 나를 단호하게 말렸었겠지땅에 힘없이 너부러진 청바지를   흘겨보고는 그대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그래말렸겠지분명……. 슬프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일이라고는 높은 천장을 바라보며 맥없이 웃는 것밖에 없었다.

  네가 나를 떠난 지도 어언  달이 지났다  아니 달이 맞나내가 정신이 나가서 그저께 일어난 일을   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아닐까?
  어쨌든 그때의 너와  사이에서 흐르던 기류는 굉장히 살벌했었다여태까지   번도 크게 싸운  없는 사이라곤 믿을  없을 정도로 으르렁대며 다퉜었지

 

 

 


  처음 네가 집을 나가버렸을 때의 나는 그야말로  만난 고기나 다름없었다헤어짐의 슬픔 따위를 느낄 틈은 없었다 시절에는 오직 '놀자!', '즐기자!'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냄새가 싫습니다.'라는 너의 단언으로 인해 마지못해 끊었던 담배를 오래간만에 물어보기도 하고친구를 통해 알게  여러 여자를 품에 끌어안기도 했다. 또 뭘 했었더라. 이것 외에도 저지른 짓들은 끝도 없이 많은데 막상 떠올리려고 하니 어째선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각종 유흥에  빠져 있던 나는 제법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아니사실  따위야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었다현관문을 열고 '다녀왔어.' 말해봤자 반겨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무미건조한 집이 뭐가 좋다고그렇게 하루하루를 바깥에서 살던 내가 집안 사정을  리가 만무했다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큼직한 짐이 없어지든수납장 위에 올려 두었던 갈색 액자 속에  사진이 갈기갈기 찢겨 형체를 알아볼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리든 나로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  사실을 깨달은 것도 고작 얼마 전이었다. 깨진 액자의 유리 조각에 너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붉은 피가 굳어 있었다는 건 그저껜가 그끄저께에 알게 됐고.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애써 모른 척했다

  슬슬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귀찮아졌을 무렵, 나는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자고 가도 상관없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나서 주변 사람들을 텅 빈 집 안으로 잔뜩 불러들였다. 덕분에 고독함으로 가득 차 있던 집 안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고, 그와 동시에 씁쓸하고 어지러운 알코올 냄새가 실내에서 한가득 진동했다. 그렇게 며칠간은 정말 즐거웠다. 평생 이렇게 놀 수 있다면 삶이라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했었다.
  하지만 그 미미한 행복마저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했다. 며칠간의 유희를 계속 즐기던 나의 친구들은 '여자친구 때문에', '너도 피곤하지 않겠냐', 라는 등의 명분을 대고서는 차차 하나둘씩 자신의 터로 돌아갔다. 그렇게 마지막 남아 있던 한 명마저 '다음에 보자.'라는 말과 함께 현관문을 밀고 떠나갔을 때,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혹시나 너로부터 문자 한 통이라도 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종종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곤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다. 모두가 떠나간 지금 내 핸드폰에 쌓이는 거라곤 시답잖은 스팸 문자들밖에 없었다. 씁쓸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참하게 깨진 유리 사이사이에 흩뿌려져 있는 사진 조각들을 수많은 쪼가리 사이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발견한 이후로부터는 뱃속에서부터 무어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부글부글 끓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기 얼굴은 아주 세상에서 없어져도 될 존재라는 듯 갈기갈기 찢어 놨으면서, 어째서 내 얼굴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걸까, 너는

  분노와 후회가 머리끝까지 솟았고, 그렇게 며칠간 또 술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냈다. 만나봤자 별 위로 안 되는 한심한 친구들도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다들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 버렸다

 

  그렇게 반쯤 죽은 삶을 살던 와중, 언제였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딱 한 번 그리움과 슬픔을 담아 너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과연 네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사랑한다'? '미안하다'? '돌아와 줘'? 글쎄. 아직도 잘 모르겠다.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살아는 있는지, 밥은 잘 먹는지. 그런 간단한 안부를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날 떠난 지금은 과연 얼마나 행복한지 궁금했던 건 아닐까. , 그런 잡다한 고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발신 버튼을 꾹 누르고 나서 몇 초 후에 들려오는 소리는 평범한 통화 연결음 이 아니라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그 순간 딱딱한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너의 이름만을 애타게 외쳤다. 이미 잔뜩 늦어 버려 놓고서는

  나는 또다시 폐인이 되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네 흔적이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푹신하다며 네가 좋아하던 소파, 네 입속을 들락날락한 전과가 있는 수저, 너와 함께 밥을 먹던 식탁 등등 내 주변에서 너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은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들에 시선을 맞출 때마다 괴롭게 떠오르는 네 뒷모습. 그래, 너를 떨쳐 버릴 방법 따위가 나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처음 시작은 소소한, 그 어디서든지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말싸움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갈라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만약 내게 과거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잠깐 주어진다면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네가 떠나가기 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는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면서 싹싹 빌겠지. 하지만 슬프게도 옛날의 나는 굉장히 멍청했다. '이렇게 조금 싸우다가 몇 시간 후면 풀리겠지.'라는 오만한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아둔했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공방이 지속되자, 결국 참다 참다 못한 네 입에서는 여태껏 들어본 적도 없는 저주스런 악담들이 한바탕 쏟아져 나왔다. 문장들 사이사이 험한 욕설도 조금씩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내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내세웠고, 그 결과. 너의 증발.  

  다른 수많은 저주 사이에서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한마디가 있다. '정말이지, 당신이라는 사람 더는 봐줄 수가 없어. 앞으로도 평생 그리 살다가 썩어 문드러지면서 고통스럽게 죽어 버리길 바랍니다.'. 그 비참한 말마저 '어차피 곧 풀릴 거면서.'라 시답지 않게 받아친 나를 너는 얼마나 증오하고 있을까?
 

  그로부터 한 20일 정도 지났을 때, 나는 더 이상 네 웃는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떠오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마저 기쁘게 만들어 주던 그 행복한 표정을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마음에 수납장 위에 올려져 있던 액자를 무심결에 찾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설마 너는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너를 갈구하게 될 줄 알고 자신의 기쁜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 건가. 대단한 걸, 네 계획 대 성공이다

  나는 네 체취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소파 위에 털썩 앉아 너와 함께였던 과거를 곰곰이 되새겼다.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그러고 보니 네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 건 과연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처음 동거를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 둘은 굉장히 행복했는데. 신혼부부 못지않은 달콤한 삶을 꿈꾸기도 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그래. 확실히 네가 이 집을 나간 건 어떻게 보면 정말 당연한 일이다. 나 같은 녀석의 장단을 맞춰 주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너에게 저지른 만행들이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죄책감이 잔뜩 물밀려 들었다. 널 비참하게 만들고 결국 떠나보낸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그 쓰디쓴 악결과를 힘들게나마 받아들였다.

  그런 암담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카가미였다. 순간적으로 네가 돌아온 게 아닐까 하는 희망에 입안소리로 '테츠?'라 중얼거렸지만, 반갑게 문을 열어주자마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날아오는 괴팍한 주먹은 절대로 너의 것이 아니었다.  

 

 "미친 자식 같으니라고. 너 여태껏 무슨 짓을 하고 산 거냐?" 

  맞은 뺨의 얼얼함을 달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는 눈을 부릅뜨고 내게 폭언을 내뱉었다. 그리고서는 '너 같은 녀석한테는 인간의 자격도 없다.', '네가 무슨 잘못을 한 건지 감이 오기는 하냐?'라 소리치며 얼떨떨하게 서 있는 나를 향해 계속 주먹을 꽂았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눈알을 부라리며 당장 상대방에게 달려들었겠지만, 그때의 난 그 어느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아니 대관절 자격이 없었다. 카가미의 일침들은 죄다 옳은 내용으로만 가득 차 있었으니까

  이후로도 난 카가미에게 몇 대를 더 맞았고 결국 바닥에 완전히 뻗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그는 '.'하며 혀를 한 번 세게 차고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집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냐?" 

  카가미는 베란다 쪽의 창문을 활짝 열며 나를 향해 구박하듯 소리쳤다. 역겹게 풍겨오던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허공에서 지워짐과 동시에 얼음장같이 찬 공기가 실내로 잔뜩 날아들어 왔다. 이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신선함인가 싶었다. 나는 신발장 앞에 힘없이 드러누운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냥 잠깐만이라도 쉬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주방에서부터 솔솔 풍겨 오는 음식 냄새에 정신이 들었다.  

  내가 눈을 뜬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었다. 싱크대에 가져다 놓기 귀찮다는 이유로 다 먹고 나서도 식탁 위에 계속 올려 두었던 라면 냄비도, 거실 바닥에 멍청하게 벗어 놓은 각종 옷가지도, 조금만 더 쌓으면 조그마한 산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잔뜩 솟아 있던 재떨이 위 담배꽁초들도, 수납장 옆에 고이 모셔 놓았던 깨진 유리와 사진 조각들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가 정녕 내가 살던 장소?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깼냐?" 

  그 와중에 짜증스러운 얼굴을 지은 채 부엌에서 걸어 나오는 카가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잔뜩 피어오르던 여러 망상 속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 그렇구나. 역시 저 녀석이 다 치워버린 거구나

 

 "다음에 왔을 때에도 이렇게 멍청하게 살고 있으면 그땐 진짜로 죽일 테니까." 

  뭘까. '다음에 왔을 때'라는 건 언젠간 또 오겠다는 소리인가.  

  한 일 분 정도 넋이 나가 있던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지금 당장 저 녀석을 붙잡아서 네 안부라도 물어봐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카가미는 이미 현관문을 열고 집을 떠나간 지 오래였다. 굳게 닫힌 현관문만이 내 시야를 막고 있었다

  이번에도 결국 이렇게.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제 나는 스스로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했다. 스스로, 스스로라는 말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카가미가 깨끗하게 청소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워지지 않은 너의 흔적이 집 안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그냥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너에게 집착하며 축생 같은 삶을 살아가다가는 정말 네가 말했던 대로 썩어 문드러지다가 비참하게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건 여담이지만, 어제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핸드폰을 들어 다시 한 번 더 다이얼에 네 번호를 입력해 보았다. 처음 전화를 걸었던 그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내가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잔뜩 떨리는 손가락으로 발신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 너머로 들려 올 소리만을 기다리니,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역시 영락없었다. 잠깐이라도 기대감을 품었던 나 자신이 너무나도 멍청하게 느껴졌기에 힘없이 웃으며 핸드폰을 소파 위로 가볍게 던져 버렸었다

 

  벌써 한 달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네가 떠나기 전, 종종 농담 삼아 말했던 '난 테츠 네가 하루라도 없으면 죽어 버릴지도 몰라!'라는 낯간지러운 문장을 되새겼다. 역시 말은 함부로 내뱉는 게 아니로군. 네가 떠나간 지 하루는커녕 무려 30일이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다. 내가 존재하는 이 장소는 천국이 아닌 바로 우리 집이다. 비록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할지라도 아직 죽지 않았다. 그래,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카가미가 나를 때려 팼던 그 날처럼 나는 누워 있다. 만약 네가 지금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면 과연 너는 내게 무슨 말을 해 줄까. 이제서야 조금 사람처럼 변했는데,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주지는 않을까?  

  실현되지 않을 망상을 가득 펼치며 팔을 눈 위에 얹었

 

 

 

[140131] [쿠로코 테츠야] 쿠로코 생일 축전 합작 글

 

 

 

  130일의 오후 1155.

 

  슬며시 눈을 떠 베개 옆에 놓여 있는 새까만 디지털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꿈나라로 떠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아직 잠이 오질 않습니다. 조금만 버티고 있으면 눈은 알아서 감기겠지, 감기겠지, 했던 게 어느덧 1시간 전부터 이어져 온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역시 저는 들떠 있었던 걸까요, 왠지 시합을 하루 앞둔 카가미 군의 설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아직도 별로 실감은 안 나지만, 곧 현실로 다가올 5분 후는 1월의 끝자락인 31일이자 1년 만에 돌아온 나의 생일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옛날의 저는 생일이라는 기념일을 그다지 중요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지요. 초등학생 때부터 존재감이 없었던 제 생일을 챙겨주는 사람은 가족을 제외하고선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른 연령대보다 유독 질투심이 강하고 별거 아닌 말에도 금방 토라져 버리는 저학년 시절에나 조금 속이 상했을까요. 점점 삶을 알아가고, 다양한 생각이 들쑥날쑥 자라나기 시작한 고학년 무렵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내 생일'이라는 기념일에 관심을 끊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 혹독한 결심이었을까요. 그렇다고 딱히 누군가가 '너 같은 아이에게 생일이라는 날은 있으나 마나니까 그만 잊어버리렴.'하며 강요한 건 아닙니다. 그저 아무도 알려 하지 않고, 기억하지도 못하는 날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라 스스로 늘 생각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기가 태어난 날을 축하받는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해?'하는 서글픈 생각도 더는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에게 131일은 한낱 찬바람 거세게 휘몰아치는 어느 겨울날에 불과했습니다. 그 사실에 '어떻게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지 않을 수가 있지?'라며 딴지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 그래도 마음은 오히려 훨씬 편했습니다.

 

*

 

  그 완고하던 관념을 바꾼 건 아마 중학교 3학년, 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막 지표면을 달구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사실은 그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던 날의 일시는 물론이요 심지어 장소까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딱히 감명 깊은 일이랍시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소중한 비밀 일기장에 털어 놓았다던가 별로 그런 소녀다운 취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년 반이나 지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걸 기억하느냐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저는 이리 대답하겠습니다. 그때는 618, 다름 아닌 같은 농구부원인 키세 군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키세 군은 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오늘 제 생일입니다! 축하해 주십셔!', 하며 널리 광고하지 않더라도 주변인들이 알아서 그의 생일을 챙겨 주곤 하더군요. 그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케이크가 얼굴에 정통으로 꽂히는 등 한바탕 거하게 축하를 받고서야 그는 ', 오늘 제 생일이었슴까?'하며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다가 이어 초등학생 마냥 배시시 웃습니다. 그 미소는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고 있을 중학 3년생 남자아이치고는 굉장히 순수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하늘에 저녁놀이 불그스름히 물들기 시작했을 즈음, 다른 농구부 부원과는 길이 엇갈려 헤어지고 저와 키세 군만 길거리에 남아 나란히 걸으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교 중인 그의 모습은 참말로 '꼴사납다'는 단어 외로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언제나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던 그의 예쁜 금발은 생일 케이크를 귀엽게 장식하고 있던 하얀 생크림으로 잔뜩 범벅되어 기분 나쁠 정도로 질퍽거렸고, 바로 어제 세탁소에서 찾아온 듯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하기만 하던 교복은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위해 일어났던 사소한 다툼무라사키바라 군이 그를 농구부 부실로 포획할 때 발생한 약간의 몸싸움으로 인해 꾸깃꾸깃해진데다가 무슨 점박이 강아지의 까맣고 하얀 털처럼 때가 잔뜩 타 버렸기에 과연 그가 이번 주말까지 저 걸레짝을 입고 다닐 수는 있으련 지가 의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이 굉장히 흉하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와중에도 키세 군은 헤프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나한테 말을 걸더군요.

 

  "이야, 이런 생일 축하 한 번만 더 받았다가는 몸이 남아나질 않겠슴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실소가 픽, 하고 터져 나왔습니다. 학교에서 벌어졌던 무시무시한 일명 '키세 료타 생일 경축 이벤트'를 받고아니 당하고도 화 한번 내지 않는 그가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게 느껴졌기 때문일까요. 본래 성격이 유순해서 그런 건지, 자신을 축하해 준 고마운 친구들을 위해 일부러 분노를 죽이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키세 군은 오늘 하루 동안 단 한 번도 싫은 기색을 내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 물론 가끔씩 '너무햇!'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건 예외로 치고요.

 

  "그래도 키세 군은 좋겠네요. 생일을 기억해 주는 친구가 있잖습니까."

 

  그의 얼굴빛이 제법 좋아 보였기에 별생각 없이 뱉은 한마디였습니다. '좋겠네요.'에 부러움의 의미는 없었을 뿐더러 나에게 '생일을 기억해 주는 친구'가 없다는 이유로 시기심을 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생일을 맞아 행복으로 가득 찬 키세 군을 위한 의례적인 말 중 일부일 뿐이었지요.

 

  ", 그런 가여?"

 

  그는 쑥스러웠던 모양인지 검지를 들어 자신의 뺨을 살짝 긁었습니다. 그러고서는 가볍게 올라가 있던 양 입 꼬리를 좀 더 높게 들어 올려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군요. 그의 머리에 허연 생크림만 묻어 있지 않았더라면 그 웃음이 훨씬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마음 같아서는 손수건으로 닦아 주고 싶었지만 그 모습도 나름대로 멍청해 보이면서 웃겼기에 그냥 저대로 놔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일부러 모른 척했습니다. 만약 그에게 타인의 생각을 읽는 기이한 능력이 있었다면 울상을 지으며 '너무햇, 쿠로콧치!'라는 말과 함께 달려들지 않았을까 싶네요. 키세 군이 능력자가 아닌 평범한 남학생이라 다행이었습니다.

 

  ", 근데 있잖아여 쿠로콧치."

 

  그러던 와중 갑자기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며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그 의문에 가득 찬 또랑또랑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잠깐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수업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는 선생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다만 그 초등학교 1학년을 고개 빳빳이 들어 올려다봐야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요.

 

  "쿠로콧치는 생일이 언젬까?"

  "?"

 

  사실 조금 멈칫하지 않았다면 그건 틀림없이 거짓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키세 군이라면 뒷내용을 들으나 마나 '오늘 제 플레이 어땠슴까?'라던가 '제가 지난번에 촬영을 갔었는데 말이져!'등의 이야깃거리를 꺼낼 줄 알았기 때문이지요. 나에게 그 말은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친우 사이라면 한 번쯤은 오고 갔을 지극히 평범한 물음이었지만, 생일이라는 기념일을 있는 둥 마는 둥 하며 잊고 살아왔던 내겐 굉장히 생소한, 아니 생소의 단계를 떠나 또래를 상대로 처음 받아 보는 질문이었기에 조금 머뭇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일반적인 사람이었더라면 자연스럽게 '제 생일은 몇 월 며칠입니다.'하고 대답했겠지요. 하지만 그 평범한 한마디조차 어색하게 느껴져 고작 입만 뻐끔거리는 내 자신이 너무 갑갑했습니다.

 

  "쿠로콧치?"

  ", …… 그게, 131일입니다."

  "아하."

 

  그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자기 생일도 모르는 멍청이로 낙인찍힐까 봐 급히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키세 군은 흐응, 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요.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던 그 정상적인 반응에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뱉었습니다.

 

  "만난 지가 1년이 넘었는데도 여태까지 계속 모르고 있었네, 정말 미안해여."

 

  그는 허공에서 놀고 있던 손을 교복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음과 동시에 겸연쩍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대답이랍시고 입안소리로 '괜찮습니다.'라 중얼거렸었는데, 키세 군이 과연 들었을는지 모르겠네요. 주머니에서는 그의 손과 함께 흰 핸드폰 하나가 쥐어져 나왔습니다. 키세 군은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살짝 밀어 핸드폰의 잠금을 해제하자마자 갑자기 빠른 속도로 손가락을 놀리며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짜잔!"

 

  그리곤 몇 초나 지났을까, 그는 갑자기 내 안면에다가 액정을 쑥 들이밀었습니다. 뜬금없는 그 행동에 깜짝 놀라 그만 뒤로 나자빠질 뻔했었던 나는 그에게 지금 위험하게 뭐하는 짓이냐며 따지려 했지만, 어느새 잔뜩 밝아져 있는 키세 군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 이게 뭔가요?"

 

  동글동글한 폰트로 '131, 쿠로콧치 생일'이라고 적혀져 있는 핸드폰 메모가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습니다.

  "뭐긴여. 이날 쿠로콧치 생일이라면서여?"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키세 군이 내게 물었습니다.

 

  "전 이렇게 저장을 해야만 기억이 나더라구여. 쿠로콧치 생일 까먹으면 안되잖슴까?"

 

  해맑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 잠시 넋을 잃을 뻔했습니다. 십여 년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을 오늘 한꺼번에 다 들은 것 같다고 표현을 하면 실감이 나려나요?

 

  “131일이라, 그때쯤이면 윈터컵도 끝날 테니까 쿠로콧치 생일 챙겨줄 수 있겠네여!”

 

  갑자기 목 아래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뜨거운 액체와 같은 것이 잔뜩 북받쳐 묘한 감정을 자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키세 군에 대한 감동일까요, 아니면 여태까지 혼자서 품어 왔던 겨울 하룻날에 대한 서러움일까요.

 

  여전히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키세 군의 핸드폰 액정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으니 '내 생일'을 누군가가 물어봐 준다는 것이 이렇게나 설레는 일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여태까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던 내 생일을 키세 군은 매우 자연스럽게 물어봐 주었고, 행여나 잊어버릴까 봐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까지 했습니다. 타인에게는 굉장히 일상적인 일 중 하나겠지요. 친한 친구에게 생일을 물어본 다음 그 날짜를 까먹지 않기 위해 달력에 써 놓는 건 나도 여러 번 해 보았습니다. 물론 오늘 키세 군의 생일에도 동그라미를 쳐 놓았었고요. 하지만 언제나 나는 그런 방식으로 남을 기억하는 입장이었지, 살아오며 단 한 번도 기억되는 입장에 선 적은 없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짝사랑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하지만 바로 오늘, 그 기나긴 15년의 기록이 깨졌습니다. 그는 여차하면 정말로 세상에서 잊힐 뻔했던 쿠로코 테츠야의 131일을 구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키세 군."

  ", 왜여?"

 

  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 속으로 가져가며 밝게 대답했습니다. 키세 군은 자기가 내뱉은 말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아마 꿈에도 모르겠지요.

 

  "감사합니다."

  ", 감사라녀? 갑자기 왜?"

 

  그 ''라는 질문에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이 들뜬 감정을 계속 혼자 안은 채로 끝까지 가져가고 싶었거든요.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글쎄요. 사실 조금 쑥스러웠던 걸지도 모릅니다. , 그 덕분에 하교하는 내내 키세 군에게 계속 '치사해욧!'소리를 들으며 달달 볶여야 했지만요.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검은 펜을 쥔 채 달력을 펼쳐 들어 아무런 날도 아니란 듯이 텅 비어 있던 131일에 큼직한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던 기억이 납니다.

 

*

 

  그리고 그렇게 고대하던 중학교 3학년 쿠로코 테츠야의 생일은 테이코 중학교 전국 대회 3연패, 윈터컵 종료와 함께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

 

  "."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을 하던 사이에 디지털시계의 삐삐, 삐삐.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요란스레 울렸습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날이 왔습니다. 결국에는 다시 돌아온 131, 내 생일.

디지털시계 특유의 그 알람은 왠지 계속 듣고 있으면 당장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건 생각만 해도 짜증나는 일이었기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손을 놀려 시계 윗부분에 나 있는 작은 버튼을 꾹 눌렀습니다. 그와 동시에 듣기 싫었던 기계음은 뚝 끊기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12시를 맞았으니 이제 슬슬 자야겠지요. 나는 이불 끝자락을 잡고 내 얼굴 쪽으로 쭉 끌어당겼습니다.

  띠딩!

  하지만 이번에는 영 다른 쪽에서 기계 소리가 들리더군요. 이건 또 뭔가 싶어 나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알림 음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습니다. 그 소리의 근원은 다름 아닌 서랍장 위에 놓여 있던 내 핸드폰이었습니다. 핸드폰…… 이 늦은 시간에 왜 핸드폰이 울리는 걸까요. 누군지는 몰라도 밤중에 메시지나 보내고 있다니, 참 예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확인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 알림을 무시한 채 다시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훈련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기억해 냈거든요. 또 그 지옥 메뉴인걸까요, 탄식 섞인 한숨을 짧게 내뱉고 나서 스르르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자 작년의 그가 내게 해 주었던 말이 불현듯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쿠로콧치 생일 챙겨줄 수 있겠네여!'

 

  …….

  혹시?

  나는 반사적으로 내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찬 다음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서랍장 위에서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집었습니다. 지금 오고 있는 저 수많은 연락, 그중 하나가 혹시 키세 군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비록 그가 말했던 '윈터컵이 끝났을 때'가 지금은 아니었지만, 내 생일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오직 키세 군밖에 없을 테니까요. 아릿하게 쿵쾅거리는 가슴은 이미 진정 불가였습니다. 떨리는 엄지손가락을 핸드폰 액정에 가져다 댄 다음 옆으로 살짝 밀자마자 통신사에서 기본적으로 깔아 주는 밋밋한 바탕 화면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핸드폰은 '띠딩!'하며 자꾸 울리더군요.

  키세 군, 정말로 당신인가요. 메시지 수신함 아이콘을 누르고 나서 화면이 뜨기만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이 내게는 마치 초고속 카메라의 슬로 모션과도 같았습니다.

막상 1초도 지나지 않아 수신함에 저장된 몇몇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엄습해오는 긴장감과 떨림에 입속에 한가득 고여 있던 침을 꿀꺽 삼킨 다음 가장 마지막에 온 메시지부터 차례대로 찬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 생일축하해! 생일빵 때릴 거니까 오늘 하루는 미스디렉션 할 생각 않는 게 좋을걸!'

  '오늘 네 생일이지? 축하한다 쿠로코'

  '쿠로코 생일 축하! 오늘 학교에서 보자!'

  '자냐? 생일 축하한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애정하는 쿠로코 생일 축하합니다'

  '쿠로코 생일이라면서? 축하축하!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길 바랄게! , 물론 연습 빠질 생각은 하지 말고^-^'

 

  6통 전부 세이린 농구부원들의 축하 문자였습니다.

 

  아, 맞아요. 하긴 키세 군과 나는 이제 같은 팀이 아니니 그가 내 생일을 기억해 줄 리 없지요. 잠시나마 헛된 기대를 품었던 내가 너무 바보 천치같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멍청하고 단순한 키세 군이라 해도, 한때 그 누구보다 친했던 동료였다곤 해도 어차피 지금은 서로가 적대 관계인데 일부러 잠도 설치면서까지 적의 생일을 축하할 리가 없잖습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요동치던 심장은 어느새 쥐 죽은 듯 고요해졌고, 파르르 진동하던 손도 자기가 언제 떨었느냐는 듯 매우 멀쩡했습니다.

  키세 군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렇게나 실망하다니, 나 정말 최악이네요. 세이린으로 진학을 결정함과 동시에 키세 군에 대한 마음도 깔끔히 접은 줄 알았었는데, 지금 내 상태를 보고 있으니 꼭 그렇지도 못했나 봅니다. 억제하면 억제할수록 도리어 미련만 잔뜩 쌓여 가잖아요.

  핸드폰 액정을 눈에 가져다 대고 세이린 부원들에게서 온 문자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습니다. 축하해, 축하. 축하한다……. 하나하나 따뜻한 축하 말에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이렇게나 다정한 동료들을 가까이 두고서는 먼 곳의 키세 군만을 찾아 헤맸던 내 자신이 굉장히 부끄러워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순수하게 기뻤습니다.

  가장 처음에 온 감독의 문자에 답장하기 위해 메시지 입력 버튼을 눌렀습니다. 화면 아랫부분에 미니 키보드가 나타났고, 나는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장을 치기 위해 ''버튼이 있는 쪽으로 엄지손가락을 뻗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띠딩!

  다시는 울리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그 명랑한 문자 알림 음에 그만 숨이 멎을 뻔했습니다. 나아가던 엄지손가락은 신호에 걸린 자동차처럼 허공에 우뚝 멈춰 섰습니다. '새로운 메시지 1, 확인할까요?'라는 문구의 알림창만이 핸드폰 가운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이 문자도 키세 군이 아닐 거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고 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설레는 걸까요. 조금 전에 죽어 버린 줄만 알았던 그 박동은 어느새 다시 살아나 가슴 속에서 미친 듯이 북을 쳐대고 있었습니다. 이게 정말로 키세 군이라면?

  여기서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정말로 심장이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확인'버튼을 꾹 눌렀습니다.

 

 

  '쿠로콧치'

 

  하얀 바탕과 함께 화면에 떠오른 그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딱딱한 물건에 머리를 세게 가격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를 '쿠로콧치'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명, 키세 군밖에 없으니까요. 말로는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면서도 내심 그이길 바라고 있다가 내용을 보고서는 얼마나 놀랐는지 순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줄 알았습니다. 혹시 누군가가 장난을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히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니, ''한 글자, ''두 글자, ''. ……역시나 그입니다.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기뻤습니다. 뺨은 붉게 타오르다 못해 문구점에서 파는 500원짜리 손난로 못지않게 뜨끈뜨끈해졌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그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지요. 고작 쿠로콧치라는 부름 하나에 이렇게나 기뻐하고 있는 내가 우스우면서도 조금 한심했습니다.

 

  과연 어떤 답장을 보내야 좋을지 몇 분 동안 계속 고민만 하다가 결국 '.' 한 글자만을 보내 버렸습니다. 혹시나 이 이후로 그로부터 문자가 안 오면 어떡하지, 설마 짧게 보냈다고 토라지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혀로 입술을 핥으며 초조하게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가, 다시 잠갔다가를 끊임없이 반복했습니다. 다행히도 내가 문자를 보낸 지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띠딩!'하는 알림 음이 방 안을 울리더군요.

 

  '잠깐 나와 주지 않겠슴까? 집 앞이 에여.'

 

  순간 내 눈을 의심했습니다. 지금? 오후도 아닌, 오전 12시가 넘은 지금 이 시각에 우리 집 앞?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어 그 문자 메시지를 받은 후 멍하니 핸드폰 화면만 쳐다보고 있다가 곧바로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침대 옆에 나 있는 사각 창문으로 다가간 다음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한밤중의 새까만 어둠 속이었지만 다른 것에 비해 유달리 눈에 띄는 키세 군을 찾아내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바람 쌩쌩 부는 이 한겨울에 춥지도 않은 모양인지 외투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미련하게 우뚝 서 있는 그 남자는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맞았습니다. 누가 모델 아니랄까 봐 위에서 내려 봐도 멋있는 그의 모습에 당장에라도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풋, 하고 터져 나왔습니다. 정말이지, 아무리 성인 못지않은 체격과 외모를 가지고 있다지만 속은 아직 고등학생인 주제에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바깥을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키세 군의 기분이 어찌 되건 '미쳤습니까'라던가, '가족들이 다 자고 있어서 곤란합니다'등등 굉장히 까칠한 어투로 답장을 보냈겠지요.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을 생각입니다. 더는 망설일 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려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라는 말을 그에게 보내기 위하여 메시지 입력 칸을 터치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또 새로운 문자 한 통이 전송되어 오더군요. 이걸로 지금 몇 번째 울리고 있는지 모를 문자 알림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참 성격도 급하다니까요. 이번에도 나는 주저하지 않고 '확인'버튼을 터치하여 수신된 메시지의 내용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작년처럼 사라지지 말아 주세여'

 

  그 짧은 문자 한 통에 담긴 키세 군의 진심이 액정 바깥으로 묻어 나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음, 혹시 키세 군이 문자 메시지에 눈물을 나오게 하는 약을 발라 보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갑작스레 찡해져 오는 코끝은 마치 전기가 지나간 듯했습니다. 또렷하게 잘 보이기만 하던 문자 메시지의 까만 글자가 멀겋게 흐려 뵈는 이유가 뭘까요. 가볍게 웃고 있는 얼굴과 반대로 자꾸만 시큼시큼하게 아파 오는 가슴에는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요. 고작 글자의 나열에 불과한 그 한 문장이 어찌나 내 마음속으로 생생하게 다가오던지 마치 키세 군이 내 옆에 잠깐 동안 앉아 있다가 문자를 읽어 주고 간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한 번 읽고 또 읽고, 메시지의 글자가 머릿속에 콕콕 박힐 때마다 뱃속에서 무언가가 잔뜩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따끈한 눈물 한 방울이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개진 뺨 위를 타고 흘렀습니다. 키세 군의 연락에 기뻐서 나오는 눈물인지, 외로웠던 작년의 서러움에서부터 나오는 눈물인지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지금이라도 울지 않으면 갑갑해서 못 살 것 같은 오묘한 기분이 느닷없이 들었을 뿐입니다. 갑자기 '사라지지 말아 주세여'라니, 이거 반칙 아닙니까. 내려가자마자 한소리 해 줘야겠어요. '설마 내가 키세 군을 떠날 만큼 멍청한 사람으로 보였나요?'하고요.

  ……이제 뭐가 어찌 되든 좋아요. 잠옷 소매로 눈가를 한 번 비빈 다음 나도 모르는 새 침대 위에 떨어뜨렸던 핸드폰을 다시 집었습니다. 그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답장을 작성해 나갔습니다. 아까 쓰려다 말았던 '내려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나갈 때 입으려고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겨울용 외투를 한 손으로 쭉 잡아당기고 빠른 속도로 몸에 걸쳤습니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모두가 자고 있어 고요함만이 가득한 집 안의 침묵을 떠들썩한 발소리로 깨뜨리며 최대한 빨리 현관으로 달렸습니다. 생일을 맞은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한밤부터 이렇게 요란 법석을 떨며 소동이니, 이번 생일은 또 얼마나 즐거울지 상상조차 안 되네요. 여러 가지 의미로.

  만약 오늘 아침에 늦잠 자기만 해 봐요, 다 키세 군 탓으로 돌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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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장, 그 녀석이 계속 코를 훌쩍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아베는 애꿎은 전등만 죽일 듯이 노려보며 한탄했다. '내 인생이 이렇지, 뭐.' 라 작게 구시렁대는 입안소리가 사뭇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한 번 더 기침을 크게 내뱉었다.
  어젠가 그저께까지만 해도 그의 몸은 굉장히 멀쩡했다.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재채기를 심하게 해 대지도 않았고, 어질어질한 머리 덕분에 밥을 먹다가 뒤로 고꾸라지는 괴기스러운 일도 없었다. 아베가 지금 콱 막힌 코를 자꾸 훌쩍이며 갑갑한 숨을 겨우 들이마시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같은 니시우라 고교의 야구부원인 미하시일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며칠 전에 아베와 미하시가 입을 맞추었으니까.
  말로는 아베'와' 미하시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따져 놓고 보자면 엄연히 아베의 독단으로 행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랑이니 행복이니 하는 예쁜 감정들에 서툴었던 어느 남고생의 시답잖은 질투심이라고 해도 좋을까. 어쨌든 아베는 투수 연습이 끝나 지칠 대로 지쳐 그야말로 무방비 그 자체였던 미하시의 입술을 훔친 전과가 있었다. 상대방의 의도랑은 전혀 상관없이.

 "윽."
  아베는 머리가 또다시 아파 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깊은 잠에 빠지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고 점심식사 후에 먹었던 약발도 떨어진 지 오래였다. 아베의 한탄 담긴 한숨 소리가 텅 빈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침대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벽걸이 시계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 동안 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벌써 시계침은 오후 5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때쯤이면 애들은 하교하고 있겠지, 오늘 야구부 포수는 누가 맡았으려나. 역시 타지마?'하는 생각이 아베의 텅 비어 있던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다.

 "타지마라……."
  침대 가장자리에서 홀로 놀고 있던 팔 한쪽을 자신의 뜨뜻한 이마 위에 얹으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타지마는 미하시와 친했다. 누가 봐도 '둘은 단짝이야?'라 물을 정도로 친했다. 아베는 언제나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그들이 친하게 지내든 말든 관심조차 없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점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타지마와 미하시가 붙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영 신경에 거슬렸다. 머리를 쓰다듬는다든지 볼이 말랑말랑할 것 같다며 쿡쿡 찔러 본다든지, 하는 행동들이 평범한 친구 관계에서, 것도 남자끼리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스킨십이었던가. 하지만 실제로 니시우라 야구부에서 그런 그들의 우정을 지적한다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아베는 가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내가 비정상인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집단이 비정상인지 사이에서.

  그러한 이질적인 감정이 말로만 듣던 질투심이었다는 것을 그가 깨닫기까지에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베는 그 잘난 두 사람의 우정이라는 것에 굉장히 속이 쓰렸고, 결국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미하시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 행동은 애정이나 연모 따위의 풋풋한 감정보다는 소유의 느낌이 훨씬 강했다. 
  너는 내 투수고, 너는 내 파트너이며, 너는 내 거야. 아무한테도 주지 않아. 맞닿아 있던 입을 살짝 뗌과 동시에 아베는 미하시가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음량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잔뜩 경직된 투수에게 아까와 같은 행동을 다시 취했다. 아무리 타지마라도 키스를 할 생각은 절대 못 했겠지, 내심 혼자만의 승리감에 푹 빠져 있었던 그였다.


  아베가 한 번 더 크게 기침을 뱉어냈다 ー 아니 그냥 게워냈다고 표현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지금 아무 알약이나 입안에 털어 넣고 그 탁월한 수면 효과의 힘을 빌려 다시 잠이나 자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는 복부까지 내려가 있던 두꺼운 솜이불을 자신의 턱까지 끌어당겼다. 별로 따뜻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때 방문을 똑똑, 하고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가볍게 두 번 울렸다.

 "타카야, 친구 왔다."
 "엑?"
  아베의 그 모습은 흡사 아침에 학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초등학생과 같았다. 뜬금없는 말에 그는 약간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약간 불쾌감이 담긴 짧은 의문 감탄사를 뱉었다. 친구고 뭐고 빨리 잠이나 자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환자 신세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가족 이외의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였을까. 아베의 어머니는 '자, 들어오렴.'하며 그의 친구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베는 자신을 찾아와 준 고마운(?) 사람의 얼굴을 이불 너머로 슬쩍 바라봤다.

 "아, 저, 아베, 군."
  듣기만 해도 타인을 갑갑하게 만드는 소심한 말투의 소유자, 다름 아닌 미하시였다. 아베의 어머니가 밖으로 나간 모양인지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림과 동시에 방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객에 당황한 그는 바로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앉았다.

 "뭐야, 웬일?"
  자꾸 드러나려고 하는 놀라움을 애써 감추고 싶었던 아베가 일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불친절한 음성에 크게 움찔하는 미하시에게 미안한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지금 본인이 병자 취급을 잔뜩 받고 있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원인에게 괜히 억지웃음 지으며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그는 미하시가 여기까지 찾아와 주었다는 사실이 내심 좋았다. 만약 계속 혼자 고요한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더라면 얼마 못 가 지루함이라는 이름의 늪지대에 빠져 그만 익사해 버렸을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 그게, 숙제가……"
 "숙제? 너 우리 반 아니잖아."
  멍청하긴, 거짓말을 하려면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해 왔었어야지. 아베는 어리석은 자신의 파트너를 마음속으로만 꾸짖었다. 그 와중에 정곡을 찔린 듯한 미하시의 잔뜩 굳은 표정은 아주 볼 만했다. 어느새 그는 양 검지를 들어 손가락끼리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용건이 있으면 얼른 말을 하지그래."
  사실 속으로 아베는 계속 웃고 있었다.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주어, 목적어, 서술어가 포함된 완전한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고 있지 못하는 미하시가 솔직히 말해서 귀여웠다. 그의 얼굴 근육은 자꾸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겨우 참아내느라 꽤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저, 그, 그게."
  얼굴이 무슨 가을날 단풍처럼 새빨개져서는 삼 초 정도 눈을 아래로 깔아 바닥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미하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아베 군이 감기에 걸린 게……"
 "아?"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을수록 미하시의 얼굴은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과도 같았다.

 "나, 나, 나 때문이 아닌가 해서……."
  그 말을 듣고서 아베는 잠시동안 벙져 버렸다. 솔직히 뜬금없지 않은가. 질투에 휩싸인 사람은 아베였고, 먼저 입을 상대방에게 가져다 댄 것도 아베였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서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 있는 소년은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는가? '나 때문'?

 "미, 미, 미."
 "……이봐, 너."
  '미안해'라 말하려던 미하시의 가냘픈 목소리는 마치 나온 적도 없었다는 듯 쑥 들어가고 아베의 불만 가득한 음성만이 적막한 방을 가득 울렸다. 아베는 한숨을 짧게 내뱉고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미하시를 향해 손을 가볍게 까닥였다. 됐으니까 이리 와봐, 라는 의미였다. 미하시는 당황에 찬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결국 친구가 앉아 있는 침대 앞까지 걸어갔다. 안 그래도 작은 몸집의 소유자가 어깨를 움츠리고 서 있어 더 작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아베는 가볍게 웃었다. 희소인지 고소인지는 그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별로 알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그저 드는 생각이라고는,
  아, 이 녀석. 귀엽네.
  아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베, 군?"
 "있지, 정말로 미안하다면."
  생략된 말, '너도 다시 걸리면 되지, 감기.'. 그 한 문장은 서로 맞춰진 입 덕분에 차마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시계는 5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초침이 세 바퀴를 돌면 그때 떼야지, 이제는 뜨거움의 수준을 넘어 거의 불타오르고 있다 느껴질 정도였던 미하시의 얼굴이 조금은 식기를 바라며 아베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내일은 내가 아닌 이 녀석이 학교에 결석하길 바라며.




[130113] [로스알바] To. 핀언니

 

 

  끔찍한 꿈을 꾸었다.
  처음으로 '꿈을 저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는 방금 전의 그 해괴한 꿈을 다시 회상하려고 무의식에 멈춰버린 머리를 쥐어짜려 애를 썼다. 평소에 꿈을 자주 꾸는 편이긴 하다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나 괴상망측하고도 불쾌한 꿈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뭐가 어쨌든, 잠자고 있는 동안에만 보이는 세계 속에서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늙어 가는 컨셉이었던 모양이다. 분명히 꿈의 시작은 지금 20대 초반의 내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젊음은 정말 짧은 시간에 불과했고, 컵에 담겨진 주스를 다 마실 수 있는 짧은 시간이 지났을 무렵,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았을 때의 내 얼굴은 이미 칠십 대 노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매섭기만 하던 눈가는 잔주름들로 가득한가 하면 똑바르게 펴져 있던 허리가 앞으로 굽기도 했고, 목소리도 잔뜩 걸걸해져 이십의 청춘은 먼 옛날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을 외모였다. 나는 꿈 속의 그, 혹은 나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시선은 나에게 '내가 불쌍하게 느껴지나?'라 말하는 것만 같았다.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리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사실 별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만약에 내가 정상적인 인간이었다면 저렇게 늙어 갔겠지', 하는 생각이 고작이었으니. 나는 허구로 가득한 내 모습을 바라보고서는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늙은이는 웃지 않았다.

  이야기가 여기서 깔끔히 끝을 맺었더라면 내가 '불쾌하다'는 평을 내릴 것 까지는 없었겠다. 티끌 한 점 보이지 않는 꿈의 흰 배경이 슬슬 깨지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이제 볼 건 다 봤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꿈에서 깨지 않았다. 막상 클라이맥스는 시작도 않았던 것이다.

  뭘까, 하는 짧은 생각은 할 틈조차 주지 않고서 바로 다음 장면이 펼쳐졌다. 과연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을까, 공백에 대해 의아스러움을 느끼려던 참에 누군가가 '꿈 속의 나'의 맞은편에 번쩍, 하며 나타났다ー아니 사실 어떻게 나타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다름이 아닌 나의 용사였다.

  잠시 흠칫하지 않았다고 하면 분명 거짓말이겠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모를 그의 얼굴과 포즈는 마치 증명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마냥 굉장히 시시했다. '멍청한 용사 씨의 성장 일기라도 보여줄 생각입니까?' 나는 마음 속으로 시비를 걸었다. 용사 씨는 마치 내 머릿 속 생각을 읽은 양 힘없이 실소만 짓고 말았다. 왠지 그답잖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그 상황에서 내가 할 가장 적당한 일은 가만히 앉아 알바 씨를 응시하는 것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방금 전 내가 변해갔던 것처럼 그에게도 무언가의 간간한 바뀜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용사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말랑한 얼굴에는 주름 하나 생기지 않았고, 허리는 매우 말짱했으며, 가끔씩 뱉는 '에……'같은 감탄사로 미루어 보아 목소리조차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장면은 계속 이어졌다. 10초가 지나고, 1분이 지나고, 또 몇 분이 더 지나도 그는 그대로였다. 성숙함과는 거리가 먼 앳된 소년의 풋풋한 모습, 꿈 속의 그는 이 세계에서 깨기만 하면 바로 만나볼 수 있는 그 현실 속 용사의 얼굴에서 변한 점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알 수 없는 괴리감이 날 엄습해온 것은 대강 이쯤부터였다. 원래 꿈이라는 녀석이 제대로 돌아가는 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때따라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나 할까, 기억이라는 이름의 유리창이 잽싸게 날아오는 웬 야구공에 의해 끔찍한 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부서져 버리는 기분이라고 할까.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시덥잖은 농담을 건넨다면 단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죽어.'라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심란했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둘러보는 알바 씨의 평범한 그 모습이 왜이리 무섭게 느껴졌던 건지 모르겠다. 금방에라도 사나운 괴물로 변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잔인무도하게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지쳐버려 힘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팔이 마치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듯 제 혼자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 댔고, 작은 칼집 안에 보관되어 있던 단검 한 자루를 살며시 꺼내 쥐었다. 다행히도 용사는 꿈 속에서마저 멍청했기에 내가 지금 무슨 행동을 취하려는지 아예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빠르게 끝내겠습니다, 이런 꿈.

 "전사……."
  갑작스레 들려오는 그 울음 섞인 짧은 부름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귀를 의심하며 시선을 그의 얼굴로 돌리니, 용사는 어느샌가부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일부러 얼굴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게 눈에 선히 보였지만 그조차도 얼마 못 가 곧이어 양손을 얼굴에 갖다 붙이고서는 서럽게 우는 것이 아닌가. 텅 빈 허공이 용사의 울음 소리로 가득 차자,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내 시선이 닿은 곳에 늙은 나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나무로 만들어진 기다란 관 하나만이 쓸쓸하게 놓여져 있었을 뿐이다.

 "하?"
  '나'는 죽었다?
  눈 앞의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늙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죽음? 누군가를 농락하는 것에 정도가 있어야지,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현실과는 너무나도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기에 기분이 영 좋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꿈이 끝나지도 않는다. 원래 꿈이라는 놈은 가장 재미있는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딱 끊겨 버리는 개구쟁이가 아니었는가? 심지어 지금의 나는 재미고 자시고 하는 즐거운 감정이라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끊길 줄을 모르는 용사의 통곡만이 빈 허공을 가득히 채웠다. 
  그 순간 눈물이라는 제목의 구슬픈 음조, 그 안타까운 멜로디에 속해 있던 마디 하나가 튀어나와 순간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아, 용사는 내가 죽으면 저렇게 슬피 울겠구나.
  절로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꿈 속의 '생명이 한정되어 있는 나'는 죽고, 용사는 운다. 그럼 반대로 현실에서는? 언젠가 용사는 나이가 들건, 우연한 사고가 발생하던 분명히 어떤 방식으로던지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러면 그때의 나는 용사를 위해서 슬프게 울 수 있을까? 지금 내 눈 앞에서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하고 있는 울보처럼 눈시울이 새빨개지고, 새어 나오는 딸꾹질을 차마 제어하지 못해서 계속 히끅거릴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유한한 생명의 종결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나 있을까?

 "……못 합니다."
  나는 입안엣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힘 풀린 손에서 단검을 떨어뜨렸다. 챙강,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전을 찌르고, 그와 동시에 눈물 자국 가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용사. 그 슬픈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나까지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나도 몇십 년 후에는 당신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코끝이 찡해졌다. 

  언제까지나 같이 남을 수 있다는 미련한 바람따위는 저버린 지 오래였다. 우리는 그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왕궁의 전사와 용사일 뿐. 그 페어가 인생의 동반자까지 발전할 리가 있겠는가. 애초에 우리는 서로 다른 운명을 지고 난 생명이거늘. 하지만 언제인가 나는 잠깐동안 기대해 본 적이 있었다. 우리가 같은 길을 걷는 것을, 우리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을, 우리가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을. 그런 소망 정도는 아무리 나라도 한 번 쯤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용사의 뺨을 나도 모르게 어루어만졌다. 눈물이 마르다 말아 찝찝한 액체가 손에 조금씩 묻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울 것만 같았기 때문일까. 감정이 급격하게 북받쳐 올라왔다. 나는 마치 접착제라도 바른 듯이 딱 붙어 버린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겨우 이별시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용사 씨. 나……"
  콰직.
  어딘가에서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가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효과음이 울려 퍼진 근원을 바라보니, 내 발 밑이었다. 방금 떨어뜨린 단검으로부터 웬 금들이 거미줄처럼 주욱 퍼져 나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은 발을 디딜 수 있는 부분이 없을 만큼 부서졌고, 나는 아무 저항도 못 해본 채 아래로 추락했다. 지금 처참히 파괴되고 있는 꿈 속 배경의 하얀 조각들이 떨어지면서 내 온몸을 긁고 베었다. 
  이상한 나라로 떨어지는 앨리스의 기분이 이랬을까. 나는 그 위험한 와중에도 용사를 찾으려 온 힘을 다해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검은 배경 위에 자잘하게 수놓아진 흰 조각들 뿐이었다. 어째서지? 용사가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서 있었고, 바로 앞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 하지만 내가 찾는 그는 나의 주변 어딘가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급속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던 나는 미친듯이 쏟아져 내려오는 조각들을 헤집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조금씩 위로 들기 시작했다.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올렸던 팔은 이미 피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흐르고 있어 아예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힘겹게 머리를 끝까지 뒤로 젖혔을 때, 비로소 하늘ー아니 내가 떨어져 내려온 공간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거기서는 무표정의 누군가가 차가운 얼굴로 나를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용사?
  그의 생김새를 정확하게 보기 위해 잠시 팔을 치운 순간, 사람에 정신이 팔려 알아채지 못했던 날카로운 조각 하나가 정확히 내 눈동자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차마 나는 그것을 피하지 못하였고, 그와 동시에 꿈은 끝났다.


  아직도 정신이 멍하다. 온몸이 굳어버려 침대 위를 떠날 기분이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의 섬뜩함이 아직 내 신체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고, 용사의 슬픈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질 생각을 않았다. 도대체 이 허무하고도 대책 없는 꿈은 나에게 뭘 전달하고 싶었을까? 내가 머지않은 미래에 느끼게 될 감정? 언젠가 있을 용사의 배신? ……동료의 소중함?
  어느 쪽이던지 영 유쾌하지 못하다. 애초에 꿈 따위에 현실을 내걸 만큼 미련하지는 않다. 예지몽이니 뭐니 하면서 좋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늘 한심하다 여겨 왔으니. 나는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시작했고,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아침부터 이불을 싸매고 가만히 앉아 있는 용사가 보였다.

 "아, 전사."
  용사는 내 얼굴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솔직히 그 꼴을 하고서는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당장 그 이불을 뺏아 춥답시고 부들부들 떠는 그를 놀려 주고 싶었기 때문에.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나아갔다. 그리고 가까워졌다.
  이불의 끄트머리 쪽으로 손을 내민 순간, 갑자기 용사의 얼굴이 꿈 속에서 봤던 그 표정과 순간 겹쳐져 보였다. 나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던 그 애처로운 얼굴. 당황스러웠다. 방금 꿈에서만 해도 그 모습은 나를 굉장히 슬프게 만들었었는데, 이 멍청한 용사는 환상도 모자라 이제는 현실에서까지 이 위험한 얼굴을 내보인다. 가슴 한 켠이 아프게 욱씬거렸다. 언젠가 이 용사도 떠날 것이라는 생각에 눈가가 따가워지고 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건 반칙이 아닌가.

 "전사, 전사."
 "아."
  그의 부름에 거의 놓을 뻔했던 정신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용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뻗었던 팔을 뒤로 뺐다.

 "갑자기 왜 울어? 어디 아픈 곳이라도?"
  용사가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 않던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하고 반박하려고 입술을 떼자마자 뺨에 느껴지는 따뜻하고도 생생한 느낌에 바로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내가 울고 있는 건가? 설마, 정말로 내가? 믿기 힘들어 검지 손가락 하나를 눈가에 가져다 대니 웬 촉촉한 것이 묻어 나왔다. 나는 그대로 넋을 잃고 말았다.

 "저기,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용사는 당황한 목소리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솔직히 조금 괘씸했다. 따지고 보면 다 당신 때문인데요, 내가 너만 안 만났으면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만,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하고 꿀꺽 삼켰다. 그래서 그 대신 다른 한마디를 남겼다.

 "꿈이 현실을 지배할 수도 있는 거군요."
 "하?"
  의미심장한 소리 하지 마, 라고 그가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묘한 말도 아닌데. 뭐, 용사는 멍청하니까 그 정도는 내가 이해해야지. 아까 이불을 끌어 당기려다가 뺐던 손을 다시 들어 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용사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러자 용사가 조그맣게 '로스.'하고 중얼거렸다.
  넌 아직 이 기분 몰라도 됩니다. 아니, 그냥 앞으로도 알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누군가를 잃고 울어야 한다는 게 당신 또는 나의 운명이라면 차라리 늦게나마 깨닫는 게 나아. 나이도 고작 10대의 중반에 서 있는 당신에게 너무 버거운 사실일테니까. 그 얼굴에 슬픔만 묻지 말아 주세요. 내가 떨어지고 있을 때 당신이 지었던 그 섬뜩한 표정, 다시는 띄우지 말아 주세요.
  바깥에 햇살이 화창하게 핀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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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28] [닌타마 란타로 2학년] 겨울의 유토피아 (미완성)

 

 

 

  지금이 겨울임을 요란스럽게 알리는 새하얀 눈안개가 온 세상을 덮고 있어 마치 미술 숙제를 하던 어린아이가 흰색 물감을 실수로 하늘에 엎어놓은 것만 같았다. 밤새도록 눈이 펑펑 내려 길바닥에 잔뜩 쌓인 눈을 설피로 꾹 밟으면 땅 위로 솟아있던 눈이 아주 부드럽게 아래로 사르르 꺼지곤 했는데, 그런 눈벌 위에서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누군가에게 발목을 붙잡히고 있는 듯해 상당히 꺼림칙했다. 게다가 설면이 거의 무릎 아래까지 올라와 있었기에 얼음장마냥 차가운 눈이 종아리를 옥죄는 그 숨막히는 느낌은 참말로 뭐라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짜증난다고 할까, 답답하다고 할까. 어쨌든 뭐니뭐니해도 제일 중요한 건 몸을 가누고 움직이는 것 그 자체가 굉장히 버겁다는 점이다. 
  과연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자신의 발이 심하게 혹사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저 멀리서 상당히 익숙한 인술학원의 교문이 사콘의 힘 빠진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는 꽝꽝 얼어 빨갛게 변한 손으로 어깨에 맨 보따리의 끈을 잡고 낑낑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사콘이 지금 매고 있는 파란색 보따리는 작법위원회가 사용하고 있는 헤드 피규어 두어 개와 크기가 거의 맞먹었다. 게다가 대체 뭐가 들었는지 아래로 축 처져 있어 금방이라도 내용물들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게 제법 무거워 보였다. 왜소한 사콘의 몸집으로 힘이 들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사콘은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과 다리를 조이는 눈 때문에 오는 길에 고생을 아주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교문 앞에 다다른 그의 표정은 거의 울 것 같았다. 얼마나 기뻤으면.
  사콘이 '인술학원' 이라고 반듯하게 써진 팻말이 걸린 교문의 문을 몇 번 두드리자 칙칙한 파란색의 사무원 닌복을 입은 낯익은 얼굴의 한 남자가 문 틈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아, 어서 와!"
  그는 커다란 짐 때문에 사콘은 교문을 통과할 때 약간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사무원 코마츠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잘 들어왔다. 코마츠다는 문을 두드린 사람이 사콘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약간 경계심을 품던 눈빛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 웃음에 답하기라도 하는 듯이 사콘도 코마츠다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학교 안에는 눈이 거의 쌓여있지 않았다. 아마도 코마츠다와 벌을 받은 닌타마 몇 명이 열심히 눈을 퍼다가 나른 덕분일 것이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인술학원을 보니 사콘은 더이상 눈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을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여태까지 계속 고생을 했으니 일단 기숙사로 돌아가자마자 눈에 잔뜩 젖은 몸을 씻고 잠이나 한 숨 잘 생각이었다.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고 6학년 이반 기숙사로 향하려 발을 떼는 사콘.

 "맞다, 사콘 군!"
  갑자기 코마츠다가 무엇인가 떠올랐다는 듯한 말투로 막 발걸음을 옮기던 사콘을 불렀다. 자신의 이름이 들린 순간 제자리에 멈칫 선 사콘이 의아스러운 얼굴로 코마츠다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세요?"
  살짝 갈라진 그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아까 교장 선생님께서 6학년들은 당장 교장실로 집합하라고 말씀하셨었는데, 아마 사콘 군도 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콘을 바라보며 멍한 목소리로 코마츠다가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콘의 표정은 짜증에 뒤덮였다. 가뜩이나 피곤해서 죽겠는데 뜬금없이 교장실이라니. 그의 입장으로서는 최악이 아닐 수 없었다. 
  불만을 토로하려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콘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고 입을 열자마자 코마츠다의 뒷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았거든."
  그 한 마디에 사콘은 바로 입을 닫았다.


 

 





 "으, 짜증나."
  전혀 예상치 못한 스케줄이 생겨버린 사콘은 교장실로 가는 길에도 잔뜩 부루퉁해진 얼굴로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안 가고 마는건데 코마츠다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까지 말했기에 왜인지 함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불만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보나마나 또 이상한 발상이 떠올랐다며 6학년들에게 일을 좀 도와달라는 내용이겠지. 그는 괜히 화풀이를 한답시고 땅에 붙어 있는 덜 쓸린 눈뭉치 발로 콱 하고 밟았다. 밟힌 눈은 부드럽게 아스러졌다.
  교문과 교장실은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한 이삼 분쯤 천천히 걸으니 저 멀리 교장실이 보였다.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교장실 앞 마당에서는 화초를 기르고 있었다. 종종 그 살인적인 추위에 그대로 내버려지는 화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인술학원의 그 누구도 한겨울에 화초를 기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콘도 딱히 신경을 쓰진 않았다.
  몇 걸음을 더 걸으니 교장실 내부가 살짝 보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몇 년 전보다 더욱 주름살이 진 듯한 백발의 교장 선생님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눈을 감고 무릎에 손을 얹은 채로 앉아 계셨다. 아마 깊은 생각에 빠지신 듯 했다.
  그 다음으로 보인 건 6학년 닌복을 입고 있는 동급생들의 등이었다. 그들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나름대로 격식을 차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콘은 별 생각 없이 천천히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애초에 다리에 힘이 쫙 풀려서 뛸 수도 없었고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교장 선생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고는.

 "카와니시 사콘! 빨리 오지 못해!"
  벼락처럼 떨어진 호통소리. 아무도 예상치 못한 고함에 사콘은 물론이고 교장 선생님 앞에 앉아 있던 다른 6학년 셋도 움찔하며 놀랐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으면 교장실 근처를 지나가던 1학년 몇 명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아닌가. 사콘은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라 짐이 무거운 건 생각도 안 하고 냅다 교장실을 향해 달렸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방으로 들어가면서도 사콘은 말로 표현 못 할 창피함과 억울함에 계속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제일 끝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사부로지가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왜 이렇게 늦었어.'라며 살짝 속삭였지만 사콘은 지금 대답을 할 상황도, 기분도 아녔기에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는 어깨에 맨 보따리를 풀지도 않은 상태로 큐사쿠 옆의 빈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께서 자신의 주먹을 입에 가져다 댄 다음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말을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너희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교장실 안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침을 꼴깍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곧 치뤄질 졸업시험에 대해 말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교장 선생님의 그 한 마디에 그들은 움찔했다. 사콘은 살짝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었고, 졸고 있었던 듯 고개를 꾸벅거리던 큐사쿠도, 멍하니 시선을 허공에 맞추고 있던 시로베도, 관심 없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검지손가락을 팔뚝 위에서 툭툭 튕겨내고 있던 사부로지도 하던 행동을 멈췄다. 그들은 뒤에 이어질 교장 선생님의 말에 집중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현재 6학년. 그 말이라 함은 곧 있을 겨울방학이 지나고 나서 마지막 졸업시험을 치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험에서 통과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예전까지의 성적이 좋았더라도 인술학원을 졸업할 수 없고, 최악의 경우는 끝까지 다 온 마당에 닌자의 길을 걷지 못 할 수도 있다. 닌자들의 세계는 끔찍하리만치 혹독하기에 아직 정서적 면에서나 실력 면에서 준비가 되지 않은 학생을 함부로 내보낼 수는 없다, 그게 바로 졸업시험의 이유였다.
  그러한 이유로, 6학년들은 지금 졸업 시험에 대해서는 상당히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진로를 한 번에 뒤엎을 수도 있는 중요한 시험이니까. 그런데 지금 교장 선생님이, 인술학원의 창시자가, 시험 출제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 그들에게 졸업 시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렇기에 당연히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결정적인 힌트라도 주려는 걸지도 모른다.

 "졸업 시험 과제를 뭘로 할 지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을 해 봤다. 왜인지 올해는 여태까지에 비해서 정하는 게 더 어렵더구나."
  교장 선생님께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따라 굉장히 굳세고도 나긋나긋한 그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졸업시험 과제는 매년 이맘떄마다 모든 선생들이 한데 모여서 회의를 한 결과로 정해지지. 절대로 나 혼자만의 의견도 아니고, 선생들 몇 명만의 생각도 아니야."
  6학년들은 모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교장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도면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움을 느낄 법한데도 교장 선생님의 얼굴에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은 지금 6학년. 마음만 먹으면 살인도 간단하게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테지."
  한 마디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의 방 안은 쥐 죽은 듯이 아주 조용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살인'과 '배신'이라는 단어가 강렬하게 들려와 그들의 마음 속에 내리꽂혔다.

 "하지만 닌자들의 세계는 너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다. 이 세계에서는 말이다, 사람 몇 번 죽여봤다고 전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군을 배신하는 법을 안다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교장 선생님이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6학년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눈동자를 아래위로 굴리며 입술을 꼭 깨물고만 있었다. 어째 이야기가 점점 심오해지는 것 같았다.

 "뭐, 여기서 더 말을 꺼내봤자 주책없는 소리겠군."
  갑자기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오묘한 웃음을 짓는 교장 선생님. 이 상황에서 그런 웃음을 왜 짓는건지 지금까지의 그들의 입장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6학년의 졸업시험은 말이다."
  드디어 본론이다. 무거워진 공기를 비롯해 방 안에서의 긴장감은 이미 최고조였다. 모두들 다 상체를 앞으로 빼고 앉아있는 것이 최대한 교장 선생님의 말을 다 귀담아 들으려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이미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 이외의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바깥에서 1학년들이 뭉친 눈을 서로에게 던지며 시끄럽게 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장실 안에서에는 모든 소리가 삭제된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반으로 자른다."
  이 말의 의미는.

  "시험 결과에 따라서 너희들 중 단 두 명만 졸업을 시키겠다는 소리다."
  폭탄 발언이었다.

 "……예?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사부로지였다. 아니, 말보다는 그냥 목에서 흘러나온 소리 같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방식이 어디에 있는가. 분명 졸업시험은 누가 더 잘하고 못하나를 따지는 게 아니라 개인의 실력이 인술학원이 요구하는 기준치에 도달하느냐, 아니냐를 재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6학년 총 네 명 중에서 두 명만 졸업을 시키겠다니. 아무리 봐도 억지였다.

 "그, 그러면 나머지 두 명은요?"
  큐사쿠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아니 모두는 지금이라도 교장 선생님께서 유쾌한 말투로 '당연히 농담이지!'라 말씀해주셨으면 하고 내심 바랐다.

 "뭐, 닌자를 포기하던지. 학교를 1년 더 다니던지."
  하지만 교장 선생님의 말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태연했다. 장난 삼아 해 본 말이라 믿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이런 게 어딨어요! 넷 중 둘은 떨어진다니, 말도 안 돼! 왜 하필이면 꼭 누군가가 떨어져야만 하는 건데요!"
 "그리고 졸업 시험은."
  참다참다 못해 결국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을 내뱉는 사부로지. 그리고 그의 말을 아주 가볍게 묵살하는 교장 선생님. 사부로지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앞니로 꽉 깨물었다.

 "아무도 모르게 치뤄질 예정이다. 너희는 결과 발표가 날 때까지 평소대로의 생활을 하면 된다."
  이 말은 6학년들을 한 번 더 벙지게 만들었다. 직접적으로 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만 하라니. 도대체 시험 과제가 무엇이기에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건지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건 여태까지 치뤄온 시험들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골치 아픈 시험 과제였다.

 "어쨌든 내 할 말은 이걸로 끝이니 다들 돌아가 보거라. 특히 사콘 군, 다녀오자마자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고."
 "아. 가,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의 갑작스런 부름에 아직 쇼크가 덜 가신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콘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충격적인 발언을 해 놓고서는 이제와서 쉬라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 와중에서도 친구들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진 사콘은 방을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면서 옆에 앉아 있던 동급생들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하나같이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입을 헤벌레 벌리고 있기도 했고, 여전히 이 상황이 혼란스러운 듯 눈을 미친듯이 깜빡이기도 했다.
  사콘은 한숨을 짧게 내뱉은 다음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는 갑자기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왔기에 씻기 전에 잠시 의무실에 들러 약을 얻어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건위원장이 의무실 덕을 본다니 조금 웃긴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보건위원도 사람이니까.
  그렇게 6학년들은 다들 교장실을 나와서 각자 자신이 가야 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까지만 해도 교장실 마당에서 시끄럽게 놀고 있던 1학년들도 어느새 기숙사로 돌아갔는지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교장 선생님을 제외한 모두가 떠난 교장실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그리고 이 날을 시작으로 6학년들 사이에서는 살벌한 무언의 눈치게임이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붓으로 시작점을 찍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늘은 계속 눈이 내리지 않았다.


 

*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날이었다. 해가 늦게 뜨는 계절이라 바깥은 아직도 깜깜했다.
  사콘은 오늘 아침따라 이상하게 눈이 더 잘 떠졌다. 아니 사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대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는 전날 낮에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피곤함을 못 이기고 바로 드러누워 곯아떨어졌었기에 밤잠이 쉽게 올 리가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졸업 시험의 내용마저 떠오르니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불면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새벽 다섯시 쯤에 겨우겨우 잠들었다가 방금 전에 다시 깬 것이다. 그런 사콘은 자신의 신세가 참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천장을 향해 소리 없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때 누군가가 이불 위에서 몸을 한 번 뒤척였다. 이불이 마찰하여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제법 멀리서 들려오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큐사쿠인 모양이었다. 처음 한 번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부터 잠깐동안은 계속 조용하더니 또다시 들리는 이불 뒤집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계속 혼자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으니 살짝 심심해졌던 사콘은 내심 큐사쿠가 깨어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으으……."
  큐사쿠가 짧게 신음했다. 사콘은 위치상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피곤에 찌든 그 목소리만 듣고도 현재 큐사쿠의 표정을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참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6년간 함께 해 온 룸메이트이기에 가능한 추측이었다.
  잠시동안 방 안에 묵직한 정적이 돌더니 얼마 안 지나서 누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대체 무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 사콘은 '베개와 이불이 동시에 눌렸다가 다시 펴지는 오묘한 느낌의 소리'라 설명하지 않을까. 어쨌든 실눈을 뜨고 큐사쿠가 누워 있던 자리를 살짝 쳐다보는 사콘. 거기서는 같은 반 친구가 졸린 얼굴을 한 채 자신의 눈을 부비고 있었다. 
  큐사쿠는 6학년 이반 학생들 중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두 번째가 사콘이고, 항상 맨 마지막에 일어나는 건 사부로지였다. 오늘은 사콘이 가장 첫 번째로 일어나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사부로지는 이불을 저 멀리 걷어차 버리고 잘도 자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기 귀찮았던 사콘은 큐사쿠가 뭘 하는지 멀리서 멍하니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큐사쿠는 팔을 위로 쭉 뻗으면서 기지개를 켠 뒤 하품을 길게 한 번 내뱉었다. 그러고는 자기 다리를 덮고 있던 두꺼운 흰 이불을 앞으로 밀어냈다. 아마도 몸을 일으키려는 모양이었다. 

 "……으음, 스테이크."
  꿈에서 스테이크라도 나온 건지 옆에서 사부로지가 이상한 잠꼬대를 해 대는 바람에 열심히 자는 척을 하던 사콘은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나중에 그가 일어나면 혹시 스테이크 꿈을 꿨는지 한 번 물어봐야겠다고 사콘이 내심 생각했다.
  그 와중에 큐사쿠는 어느새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 위에 서 있었다. 큐사쿠는 또래에 비해서 키가 좀 큰 편이었는데, 아래에서 올려다 보니 안 그래도 길쭉한 키가 더 커 보였다. 그런 큐사쿠보다 몇 센치정도 더 작은 사콘은 그가 조금, 아니 많이 부러웠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키가 작은 닌자보다는 키 큰 쪽이 훨씬 더 멋있어 보일 테니까. 뭐, 활동을 하기에는 작은 쪽이 더 수월할 지도 모르지만.
  큐사쿠는 서서도 기지개를 한 번 쫙 폈다. 아무래도 자다가 일어났느니 몸이 제법 뻐근했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아침 체조를 하려는지, 아니면 얼굴을 씻으러 가는 건지는 몰라도 방문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큐사쿠. 큐사쿠의 이부자리는 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걸어서 가는 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그는 나무 미닫이문 앞에 서서 멍한 얼굴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미닫이문을 왼쪽으로 쭉 밀었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야외의 찬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방 안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그리고, 번뜩 하는 것이.

 "으, 으아아악!"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그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키는 사콘. 자는 척이고 뭐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왜 그래, 큐사쿠!"
  사콘은 방 문 앞에 딱딱하게 굳은 채로 우뚝 서 있는 큐사쿠를 소리쳐 불렀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있던 그가 갑자기 왜 비명을 지른단 말인가. 큐사쿠는 마치 로보트처럼 아주 뻣뻣하고 느린 속도로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콘에게 꽂힌 그의 눈동자는 당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 방문 앞에."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 도대체 방문 앞에 뭐가 있다는 건지 알 턱이 없던 사콘은 거의 덮은 둥 마는 둥 했던 이불을 옆으로 쓱 밀어낸 다음 오른쪽 다리부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일어선 상태가 되자 그제서야 사콘의 눈에도 큐사쿠가 깜짝 놀랐던 원인이 보였다. 뭐라고나 해야 하나, 충격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공포스럽다고 할까. 오래 전부터 깨어 있었기에 또랑또랑했던 그의 눈망울이 그 문제의 바깥을 향하자 아무런 소리 없이 두 배로 더 커졌다. 그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 지 몰라 그저 어버버하고만 있었다.
  6학년 이반 기숙사 앞 마루에 날이 잔뜩 선 표창 여러 개가 불규칙한 배열로 꽂혀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저게!"
  사콘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아까부터 큐사쿠가 서 있던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혹시나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본 건 아닌가 하여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는데, 부질없는 짓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살을 찔리는 느낌이 올 정도로 날카로운 여러 개의 표창이 그들의 기숙사 앞에 잔뜩 꽂혀져 있었다. 큐사쿠와 사콘은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이거, 뭘까? 장난?"
  큐사쿠가 긴장되는 목소리로 살짝 속삭였다. 그 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사콘. 이걸 장난으로 보기에는 너무 도가 지나쳤다.

 "혹시 너 요며칠간 다른 성 닌자랑 시비 붙은 적 있냐?"
 "그럴 리가."
  이번에는 큐사쿠가 머리를 저었다. 사실 사콘은 반 정도 진심이었다. 큐사쿠라면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콘은 마루에 꽂혀진 표창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기에 햇빛은 쥐꼬리만큼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맨질맨질한 금속 표면이 계속 번뜩이고 있었다. 뭐 별 달리 취할만한 행동이 없었던 사콘은 계속 표창들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저걸 뽑아야 하나, 가만히 놔둬야 하나. 이런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어쩌면 인술학원을 노리고 있는 적군의 도발일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교무실에 찾아가서 노무라 선생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6학년이나 돼서 이런 것에 겁먹다니 바보구나.'라는 빈정거림을 들을 지도 모르지만 불안한 건 불안한 거다. 사콘은 여전히 밖을 바라보며 멀뚱히 서 있는 큐사쿠와 벽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표창이 꽂혀 있지 않은 바닥 쪽으로 발을 내밀었다. 약간 위험한 행동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순간 사콘의 머릿속을 푹 찌르고 들어오는 기분 나쁜 한 생각.
 
 '너희들은 지금 6학년. 마음만 먹으면 살인도 간단하게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테지.'
  사콘은 자신의 등골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이 아주 선명하게 느껴졌다. 떠오른 것은 어제 교장 선생님께서 6학년들에게 했던 말이었다.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 누군가를 배신. 배신하는 것쯤이야. 그 세 개의 어절이 계속 그의 사고회로를 맴돌았다.
  자고로 닌자란 어제까지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는 그런 잔혹한 세계에 속한 자들이다. 그런 것 쯤이야 어렸을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왔기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세계에 속해 있는 닌자였다. 설마, 설마. 정말 만약에 그 아이라면…….

 "사콘!"
 큐사쿠가 옆에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그는 표창에 발바닥을 찔릴 뻔했다. 헛, 하는 짧은 소리를 내며 뻗은 다리를 재빨리 뒤로 빼는 사콘. 갑작스런 행동에 그는 잠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다행히 옆에  있던 벽에 손을 짚음으로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런 사콘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큐사쿠.
  사콘은 고개를 아래로 떨군 상태로 침을 꿀꺽 삼켰다.

 "있잖아, 큐사쿠."
  목소리가 아주 작았기에 바로 옆에서 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그 소리는 큐사쿠에게 아주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혹시 어제 시로베 본 적 있어?"
  사콘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큐사쿠는 처음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한 삼 초 정도 지나고나서 점점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 무언가 말로 형용하기 상당히 어려운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사콘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눈치챈 것 같았다.

 "설마."
 "그 아이…… 일지도 몰라."
  또다시 충격을 받은 듯한 큐사쿠의 목소리를 이어 사콘이 말 끝을 살짝 흐리며 말했다.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설마 시로베가 이런 짓을 했을 거라니, 바보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새벽에 6학년 이반 기숙사 앞에다가 표창을 꽂고 있는 시로베의 웃는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들은 시로베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었는데, 이번 졸업 시험으로 인해 순수고 뭐고 다 잃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애초에 사람을 가볍게 베어 버리는 닌자에게 '순수하다'라는 감정을 느낀 그들이 바보였을지도 모른다. 큐사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빌어먹을 졸업시험 때문에?"
  큐사쿠가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콘도 여전히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며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활짝 열린 미닫이문 사이로 얼음장같은 겨울 바람이 슝슝 드나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문을 닫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 앞에 박혀 있는 표창을 뽑을 생각은 더더욱 않았고 말이다. 친구에 대한 배신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감정만이 현재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무거운 기류를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

 

 

 

 

 

  그 일이 있은 지로부터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떨 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6학년들 사이에는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듯한 미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의 상태를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이 둘, 차마 친구에게 무기를 겨누지 못하고 여전히 평소와 같은 생활을 보내려 노력하는 이 둘이 있었다. 전자는 시로베와 큐사쿠였고 후자는 사콘과 사부로지였다. 일주일 전 아침에 그 작은 소동이 일어난 이후로부터 큐사쿠도 점점 사납게 변해갔다. 언제는 한 번 의무실에 가져다 놓을 붕대들을 잔뜩 안고 가던 사콘이 그에게 떨어진 붕대 하나를 좀 주워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큐사쿠가 지었던 표정을 사콘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실없게 웃으며 부탁하던 사콘을 마치 하찮은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던 그. 6년간 함께 지내오면서 친구에게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는 큐사쿠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사콘은 그 표정이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부로지도 큐사쿠가 이상해져 가는 걸 대충 알아챈 모양인지 일부러 그를 기피하는 듯 했다. 그 덕분에 최근 6학년 이반의 교실 분위기는 아주 볼만했다. 게다가 가면 갈수록 기습의 정도는 더욱더 심해지고 있었다. 처음 하루이틀간은 기숙사 문 앞에 표창 몇 개가 꽂혀 있는 수준에서 그쳤었는데 이제 그것만으로는 성이 안 찼었는지 점점 더 위험한 무기들이 날아오곤 했다. 대표적으로는 쿠나이, 조금 더 위험하게는 줄표창이나 효도. 오죽하면 며칠 전에 사부로지가 목욕을 끝내고 욕탕에서 나오려던 참에 갑자기 그를 향해서 웬 표창이 날아온 적도 있었다. 아주 몇 일 더 있다가는 보록화시까지 날아올 기세였다. 공격 이외에는 아무런 소통이 없던 그들은 현재 매우 살벌했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상황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한 사람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사콘이었다. 그는 일주일 전 사건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부터 계속 자신을 공격해오는 동급생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절망스러웠다. 생각을 해 보자. 인술학원에 입학하고 나서 처음으로 사귀었던, 것도 6년 가까이 알고 지냈던 친구들이. 언제는 '만약에 우리가 졸업하고 나서 적으로 만난다면 과연 싸울 수 있을까?'같은 낯간지러운 대화를 나눴던 친구들이 이제 자신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다. 해맑은 목소리로 '난 못 싸워!'라고 대답했던 시로베도, '나도 너희랑은 좀.'하며 멋쩍게 뒷통수를 긁적였던 큐사쿠도 이제는 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눈빛에는 오직 살의, 손 위로 든 건 무기, 비열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사실 사콘도 친구들에게 공격을 가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지난번에 누군가가 의무실 앞 복도를 밟으면 천장에서 쿠나이 여러 개가 떨어지는 장치를 설치해 놓았을 때는 그도 머리 끝까지 분노가 솟아올라 범인이 누구던지 잡히면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단순히 자신이 공격받고 있다는 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 전혀 상관 없는 보건위원이나 의무실을 방문한 환자가 다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때에도 감히 무기를 집어들지 못했다. 명색이 보건위원장인데 '남을 죽이겠다'는 섬뜩한 생각을 과연 품고 있어도 되는 걸까, 하는 자괴감이 머릿속을 잔뜩 헤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콘이 남을 쉽게 공격할만큼 잔혹한 성격도 아니었고 말이다. 결국 그는 변해가는 친구들 사이에 끼여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기만 했다. 

  사콘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하고 해결책을 얻었으면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이 일을 털어놓아야 할 지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볼까하는 고민도 한 번 했었지만 그랬다가는 '나약한 학생'으로 낙인이 찍힐 것 같았기에 빠르게 포기했다. 그렇다고 후배 한 명을 붙잡고 징징거리기에는 아무래도 선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듯한 답이 나오질 않았기에 역시 포기하는 게 나을까 싶었던 그는 가만히 한숨만 내뱉었다.
  그 때 무언가의 생각이 사콘의 머릿속을 팍, 하고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보니 동급생 중에서도 자신과 같이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는 아이가 한 명 있었다. 같은 반인 사부로지. 사부로지라면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해 줄 것만 같았다. 갑자기 엄습하는 설렘과 긴장감에 사콘은 가슴에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정리하던 약재를 내팽개치고 당장 의무실을 뛰쳐나왔다. 사부로지를 찾기 위해서.



 "사부로지 있어?"
  이 시간이면 6학년들은 대개 위원회 활동으로 바쁘기에 화약위원장인 사부로지는 십중팔구 화약고에 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단숨에 화약고까지 달려온 사콘은 살짝 열린 화약고 문의 틈새로 얼굴을 들이밀며 사부로지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러자 깜깜한 화약고 안에서는 사부로지의 말대답 대신 누군가가 발을 뚜벅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왠지 모를 떨림에 침을 꼴깍 삼키는 사콘. 그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사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까만 그림자에 드리워져 있던 닌복이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만나자마자 조금 칙칙한 6학년의 초록색을 찾았다. 얼굴의 음영도 차차 걷혔다. 사부로지는 웬 커다란 단지 하나를 품에 안은채로 의아스런 얼굴로 사콘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와."
  얼굴만 살짝 내밀고 있던 사콘을 잠시 몇 초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깜빡이며 짧게 말하는 사부로지. 사실 바깥에 찬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추웠던 사콘은 그의 호의가 기쁜 듯 여닫이문의 손잡이를 잡고 자신의 앞으로 힘껏 끌어 당겼다. 바깥이 품고 있던 눈부신 빛이 캄캄한 화약고 속으로 잔뜩 쏟아져 들어갔다.

 "무슨 일이야?"
  사콘이 실내로 들어오고 다시 문이 굳게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사부로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사부로지가 들고 있던 큰 단지가 신기해 보였는지 거기에 잠깐 정신이 팔려 있던 사콘은 그 물음에 그제서야 자신이 여길 온 이유가 떠오른 듯 '아.'하는 짧은 소리를 냈다. 사콘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게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이더니 고개를 들어 자신보다 키가 큰 친구를 살짝 올려다봤다.

 "그…… 너랑 하고픈 말이 있어."
 
 

 






  그들은 화약고 벽에 기대선 채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는 의외로 빠르고 순탄하게 이어졌다. 사콘은 우선 사부로지에게 요즘 우리 6학년들의 분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부로지는 그 질문을 대충 예상하기라도 한 듯한 눈으로 몇 초간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자신도 몇 번 공격을 당한 입장으로서 썩 좋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역시나 그렇구나.'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콘. 그 뒤로는 대부분이 푸념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며칠 전에는 내가 이러이러하게 당할 뻔하였고, 이러고 있는데 갑자기 수리검이 날아왔다. 라는 등의 내용들 말이다. 하지만 의외롭게도 그런 대화에 진전 없는 넋두리에도 사부로지는 사콘의 말을 귀담아서 잘 들어주고 있었다.
  긴 한탄 혹은 서론이 끝나자마자 사콘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있잖아, 솔직히 말해도 돼?"
  사콘이 사부로지를 살짝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눈을 살며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부로지. 주먹을 꽉 쥔 사콘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망울을 살짝 빛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무서워. 친구들은 계속 나를 공격해 오는데 정작 난 나약하게 아무것도 못 하고 당황스러워하고만 있는 것도 그렇고, 까딱했다간 내가 졸업 시험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그래."
  말을 이어나가는 사콘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제일 두려운 게 뭐냐면, 이대로 더 있다가는 정말로 저 아이들이 날 죽일 것만 같다는 거야."
  정말로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여태까지 고작 이 한 마디를 남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그는 홀로 끊임없이 마음앓이를 해 왔었다. 그건 참말로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화약고 안에 정적이 가득 찼다. 말을 끝낸 사콘은 조용히 사부로지의 반응을 기다렸다. 사부로지는 여전히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것이 마치 무슨 생각에 깊이 빠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사부로지의 얼굴에 아주 잠깐동안 엷은 웃음이 번졌다.

 "나도 그래."
  그 말에 사콘의 눈동자가 두 배 가까이 커졌다.

 "저, 정말?"
 "당연하지. 솔직히 이 상황에서는 안 무서운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사부로지가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 순간 사콘은 자신의 머릿속에 온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한꺼번에 흘러 들어오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도박판에서 승리를 한 오묘한 느낌이라고나 해야 하나. 어쨌든 상당히 기쁜 건 확실했다.

 "있잖아. 그러면 사부로지."
  사콘이 그답지 않게 약간 머뭇거리는 말투로 사부로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사부로지는 눈을 한 번 크게 떠 보임으로 그의 말대답을 대신했다.

 "우리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듣기에 약간 오글거리는 대사일 수도 있지만, 그 말은 사콘이 제 나름대로 아주 진지하게 뱉은 것이었다. 덕분에 사부로지는 그만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혀를 깨물면서까지 어찌어찌 잘 참아냈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한다.

 "뭐 당연한 걸 그리 진지하게 묻고 있어?"
  그들의 심정 고백은 칠흑의 화약고에서 나눠지는 대화 치고는 제법 훈훈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공간 내에선 정말 앞으로는 행복한 일만 잔뜩 일어날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있잖아, 우리 이 대화가 6년간 나눴던 대화 중에서 가장 진지한 대화일지도 몰라."
 "뭐?"
  사부로지가 팔꿈치로 사콘을 쿡쿡 찌르며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사콘은 평소 같았으면 미간을 찌푸리는 등 온갖 싫은 티를 냈었겠지만 어째 지금은 그 장난마저도 친근한 것이 매우 반갑게 느껴졌다. 그들은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평온할 것만 같았다. 화약고 속의 따스한 온기가 그러하고, 그들이 나눈 이야기 내용이 그러하였으며, 그들이 흘린 웃음소리가 그러했다.
  
 "아, 맞다. 나 약초 정리하다가 왔었지."
  투명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사콘이 등을 벽에서 떼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아까 그는 약재를 종류별로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급한 마음에 그런 건 생각도 안 하고 화약고에 달려 왔었다. 그 사실을 니이노 선생님께 들킨다면 한 소리 들을 것 같았다.

 "가 볼게,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사부로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리며 사콘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달리 엷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 미소에 답이라도 하듯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사부로지, 허둥지둥 화약고를 나서는 사콘. 사부로지는 여전히 벽에 기대 팔짱을 낀 채 그런 사콘의 뒤를 눈으로만 좇고 있었다. 잠시 밀렸던 여닫이문이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둔탁하게 닫히자 화약고 속에는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암흑 속을 파고드는 것들은 무거운 발소리, 발소리, 발소리, 그리고…….





  어느새 어둑어둑한 저녁이 찾아왔다. 아니, 겨울이라 해가 일찍 져서 마치 지금이 저녁인 것처럼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마당에서 닌자놀이를 하며 뛰놀던 1학년들의 소리도 어느새 허공에서 사그라져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수놓아진 검푸른 하늘이 참말로 겨울의 저녁다웠다.
  사라진 태양에 절로 어두컴컴해진 의무실 안에는 주황의 촛불 두 개가 사콘의 양 옆에서 가냘프게 일렁이고 있었다. 불청객처럼 찾아온 깜깜함에 약초들의 색이 구분이 잘 안 갔었기에, 행여나 약재를 기호별로 잘못 정리하기라도 하면 나중에 어떤 큰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란타로랑 후시키조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탁한 초록색을 띄는 수상한 약초 한 줄기를 눈 앞에다 대고 자세히 들여다보며 사콘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란타로와 후시키조는 오늘 낮에 5학년 단체 실습 훈련이 있다는 이유로 의무실에는 저녁 쯤에 돌아오겠다고 했었는데, 곧 시간이 흘러흘러 누군가가 수채화 물감을 하늘에 한 방울 뚝 떨어뜨린 것처럼 상천은 점점 검게 짙어져 가는데도 어째 그들은 코빼기도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오는 길에 함정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생각이긴 했다.
  사콘은 손에 들고 있던 약초를 나무 껍질로 엮인 바구니 안에 살짝 떨어뜨려 놓은 뒤 그 바구니를 옆으로 살짝 밀어 놓았다. 그는 아까전에 화약고에 다녀온 이후로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약초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작업을 행하고 있었기에 언제부턴가 살짝 붉은 빛이 감돌던 눈은 마치 누군가가 속에 뜨거운 기름물이라도 튀겨 넣은 듯이 쓰라렸고, 이미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어깨는 조금씩 욱신거렸다. 그 빌어먹을 아픔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통나무처럼 무거운 팔을 천천히 들어올려 반대편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사콘. 그러자 시원하면서도 아찔한 통증이 온 몸을 타고 느껴졌다. '얼른 나머지 아이들이 와야 조금이라도 일을 시켜먹을 텐데.'하는 생각만 뇌리의 내벽을 강하게 치며 나온다. 사콘은 방금 꾹 눌러 감았던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살짝 뜨인 눈 너머로 흐릿하게 양촛불이 일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상당히 불규칙적인 움직임으로 울렁대는 불빛을 받치고 서 있는 촛대를 바라보고 있으니 참말로 하얬던 것이 꼭 흰 눈을 뭉쳐 놓은 것만 같았다. 흰 눈, 하얀 눈, 순백의 눈……

 "아!"
  사콘은 짧은 순간동안 느껴진 살기어린 이질적인 느낌을 의심해야 했다. 닥쳐진 사실을 인지한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살짝 열린 의무실 문틈을 비집고 매우 재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그의 무덤덤하게 양초에 꽂아 놓았던 시선도, 살짝 비스듬히 기울어진 고개도 갑자기 딱딱한 돌이 된 것 마냥 잔뜩 경직되었다. 그 와중에 뺨이 쓰라렸다. 생기가 다 꺼져버려 아픔에 무감각해진 신체 중에서도 유일하게 뺨만 살아남아 그 통증을 몸 속 신경세포 하나하나에 갖다 바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충격에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이 굳은 경직을 깨고 부르르 떨렸다.

 "또, 너희야?"
  일자로 죽 그인 상처에서 붉은색 피가 가로로 긴 모양으로 흘러 내렸다. 이제는 혀마저 굳어가는지 '야?'라는 하나의 음절이 끝나고도 그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사콘은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봐야만 할 상황에 놓인 아이처럼 아주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시야에 마른 흙색에 가까운 벽지가 들어오고, 곧 그 벽 위에 깔린 탁한 회색 그림자가 들어오더니, 원래와 같으면 아무것도 없어야 정상일 평면 위에 날이 잔뜩 서 있는 웬 사방 수리검 하나가 꽂혀 있는 장면이 들어왔다. 표면이 어찌나 번뜩이는지 양촛불에 반사된 빛이 안구 속을 파고 들어와 눈이 부셨다. 한쪽 날에는 엷게 붉은 자국이 나 있었다. 자세히 보나마나 피였다. 자신의 볼을 베고 지나간 수리검. 그 수리검을 보고 있으니 언제까지 이 야비한 공격들을 참아야 하나 싶어 굉장히 껄끄러웠다. 사콘은 오만상을 지으며 시로베 혹은 큐사쿠가 던졌음으로 추정되는 그 수리검을 집기 위해 팔을 들었다. 끓어 오르는 묘한 감정에 이걸 뽑아서 다시 바깥을 향해 던져 버릴까 싶었지만, 그는 명색이 보건위원장인데다가 잘못 던졌다가는 그냥 지나가고 있을 뿐인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다칠 수도 있었기에 그냥 그 생각은 접기로 했다. 
  그는 손가락 세 개를 수리검 표면에 가져다 댔다. 수리검이 품고 있던 찬 기운이 손가락 끝을 타고 그대로 어깨까지 쭉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 살기 어린 냉랭함에 갑자기 고향 모를 불안감이 마치 밀물 밀려오듯 사콘을 덮쳤다. 웬 쥐새끼가 뱃속을 멋대로 돌아 다니고 있는 것 마냥 속이 잔뜩 울렁거렸다. 혹시 이 날에 독이 발라져 있던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과 더불어 지금 볼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피가 금방이라도 닌복 위로 떨어질 것 같은 쓸데없는 긴장감. 그런 자잘구레한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더욱더 심리적으로 파고들어 그를 끊임없이 압박해 왔다. 그것은.

 "이거."
  큐사쿠와 시로베가 주로 사용하던 그 수리검이 아니었다. 그의 또다른 룸메이트, 늘 잠을 자기 전에 머리를 맞대며 내일은 어떤 훈련을 할까 함께 행복한 고민을 했던, 가끔씩 정말 이 녀석의 머릿속은 장난으로만 가득 차 있는건가 의심이 들기도 했던, 아까전에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며 간만에 서로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던, 사부로지의 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던 그 사방 수리검은.

 "거짓말."
  짧은 한 단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의 몸이 상당히 떨리고 있다는 것이 목소리를 통해 확연히 느껴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 말도 안 되게 현실로 다가왔다. 어째서일까, 양쪽 관자놀이 부근이 욱씬거리면서 아팠다. 그 지끈거림은 이마를 타고 뒷통수로 넘어갔다. '나 설마 속은 건가?', '아냐, 다른 애가 사부로지의 수리검을 훔쳤을 수도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하는 생각들이 어느새 미간까지 넘어온 통증을 가속시켰다. 덜덜 떨리는 손바닥을 이맛전에 짚으니 예상대로 따끈한 온도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한순간 굉장히 복잡해진 머릿속에 방금까지만 해도 전기 충격이 가해지듯 따갑던 상처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온몸의 에너지와 통증이 오직 이마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은 오묘한 느낌이었다. 배신, 비애, 분노, 혼란. 그 통증은 어디서부터 달려온 녀석일까.
  그때 의무실의 미닫이문이 불량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사콘 선배?"
  굉장히 익숙한 부름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깥에서 바람 우는 소리만 미미하게 들려오던 의무실 안은 5학년 하반의 보건위원 란타로의 물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 반갑고도 원망스러운 목소리에 사콘은 미닫이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콘은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왜 이제야 온 거야!'라며 끝도 없이 계속 따지고팠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사콘에게는 그런 말을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여전히 이마를 짚은 채 기운 빠진 멍한 눈빛으로 옆구리에 약초 바구니를 끼고 서 있는 란타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여태까지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란타로에게 딱히 크게 화가 난 건 아니었지만 왜인지 치가 부르르 떨렸다. 그 와중에도 란타로는 쓰고 있는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사콘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을 뿐, 문 앞에 우뚝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해? 안 들어오고."
  그 '뭐 해?'뒤에는 '추워 죽겠는데 빨리 문이나 닫아라!'라는 짧은 문장이 생략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콘의 목소리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평소같잖은 개미만한 음량과 고르지 못한 호흡이 그 증거였다. 서로를 맞대고 있는 손과 이마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단순히 그의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아."
  짧은 시간이나마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걸까. 짜증이 살짝 섞인 보건위원장의 목소리에 마치 둥그런 비눗방울이 톡 터지듯 정신을 번뜩 되찾는 란타로. 그는 입안엣소리로 '실례하겠습니다.'라 작게 웅얼거리며 누군가에게 쫓기는 양 잽싸게 의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바깥 바람이 차기는 찼던 모양이다. 란타로의 주근깨가 콕콕 박힌 뺨은 그 겨울 칼바람에 잔뜩 빨개져서 사랑 고백을 받아 잔뜩 수줍어져 있는 풋풋한 소년을 연상시켰다. 

 "추운데 훈련이라, 5학년들도 참 고생이네. 수고 많았어."
  사콘은 썩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추위에 그대로 노출된 채로 쿠나이를 놀리고 있었을 란타로가 조금은 안쓰러웠기에 격려 담긴 상냥한 한마디를 남기고 나서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 내리며 이마에서 손을 뗐다. 들어 올렸던 왼손에는 불구덩이같던 이마의 온기가 아스라이 남아 있었다. 

 "네."
  빙그레 웃으며 답하는 란타로. 그는 미소만은 참말로 한결같았다. 1학년 때와는 달리 지금은 키도 쑥 크고, 눈매도 제법 날카로워졌으며 목소리도 소년답게 변한 그지만 어째서인지 맑게 웃음을 지을 때만큼은 혹시 란타로가 아직도 1학년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곤 했다. 그만큼 때묻지 않았다고나 할까, 순수하다고 할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때면 사콘은 늘 '나한테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하며 또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다. 마침 지금도 그 세계에 빠지려던 참이었다.

 "저, 사콘 선배."
  푸른 약초 더미가 한가득 든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 놓으며 란타로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살짝 풀려 있던 눈이 확 뜨임과 동시에 '어.'하는 짧은 외마디소리를 내뱉는 사콘. 보건위원장이라는 사람이 대체 정신을 어디다가 내놓고 사는 건지. 보건위원들은 다 이런 걸까. 사콘을 부른 채 살짝 머리를 숙인 란타로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시선을 바구니에서 떼지 않았다.

 "혹시 이케다 선배랑 무슨 일 있으신가요?"
  흠칫, 당황으로 가득찬 빛이 사콘의 표정을 폭풍처럼 쓸어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복잡한 생각이 교차했다. '갑자기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설마. 정말로 사부로지였나.', '무슨 대답을 해야……'사콘은 쓸데없이 늘 이런 면에서만 우유부단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도 그 나름대로 문제였지만, 거짓이라 굳게 믿고 싶었던 일이 사실로 다가올까봐 굳게 다물어진 입술 안에서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는 혀만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는 현재 '응. 왜?'라는 솔직한 대답과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같은 거짓 투성이의 대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별 의미가 없었다.

 "사실 오면서 봤어요. 이케다 선배가 수리검을 던지고 도망치는 것까지, 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묵직한 바위 하나가 사콘의 뒷통수를 퍽 치고 사라지기라도 한 듯했다. 짜릿하고도 소름 끼치는 전율이 그의 등줄기에서부터 시작되어 곧 온 몸 구석구석으로 다 퍼져 나갔다. 봤다고? 무엇을? 사부로지가 수리검을 의무실 안에 던진 것을! 아니, 사부로지가 아녔을 수도 있잖아? 란타로가 잘못 봤을 확률은?

 "처음에는 제 눈을 의심했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케다 선배더라구요."
  없는 것 같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란타로의 말에 사콘은 아무런 죄도 없는 아랫입술만 질근질근 씹었다. 입술의 통증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떨림을 무마하려는 것이다.

 "조금 외람된 말씀이긴 하지만…… 요즘 6학년 선배들 많이 이상해요. 뭐라고나 할까, 예전 같지가 않아요. 눈에는 늘 살기가 가득차 있어서 무어라 말을 걸기도 어렵고."
  여전히 아래를 향해 있는 머리통 밑에서부터 들리는 목소리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독 묻은 비수로 바뀌어 무방비한 사콘의 가슴 속을 쓰라리게 파고 들었다. 따가운 그의 목 속에서는 비수와 함께 찾아온 뜨거운 감정 같은 것이 잔뜩 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콘은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실은 목보다 눈이 더 뜨거웠기 때문일까. 의무실 바깥에서 바람이 휭, 하는 효과음과 함께 크게 불었다. 그 차가움이 의무실 안에 직접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소리만 들어도 추운 것이 팔뚝과 허벅지에서 닭살이 절로 돋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사콘의 아랫입술은 점점 더 아찔하게 붉어져 갔다.


 

[131027] [쿤밤] 낙서

 

 

 

 '깨달았어요. 저도, 저도 언제나처럼 멀쩡히 살아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걸요. 그래서 연습 중이에요. 언제가 될지 모를 마지막 날에 미리 익숙해지기 위해서, 만약 제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게 될 날을 위해서. 그때 아무도 울지 않게 하려면 지금부터 미리 연습해야죠. '

 

 

*

 

 

 

  나는 거짓말 같던 너의 한마디를 새겨듣지 않았다. 마치 깊은 꿈이라도 꾸는 듯했던 그 오묘한 목소리는 곧 있을 시험에 골이 썩어가던 내 청각을 자극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일까. 흐릿한 기억 속에서나마 네 음성으로 조용히 읊히던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을 되새기려 아무리 머리를 쥐어 뜯어봤지만, 삭막하다. 아득하다. 까마득하다. 갱문(更聞)을 원하는 염원의 꽃들이 머릿속에서 만개하면 어쩌겠는가, 정작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 안타까운 일이지만, 밤 씨는…….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이후로부터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목소리가 가물가물하다. 그저께 저녁, 그러니까 시험의 층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앞둔 때. 안부를 물으러 방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밤은 자신의 방에서 어마어마한 피를 쏟아낸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경악을 금치 못했던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할 겨를도 없이 그의 곁으로 달려가 이름을 수없이 되뇌었는데, 그렇게 한 몇 초가 지났을까. 갑자기 아무런 미동도 없던 밤의 얼굴 근육이 살짝 실룩이더니 그가 가볍게 웃었다. 키득, 하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안타깝지만 살아 있을 가능성은……"
  잔뜩 벙져 있던 나를 살며시 올려다보며 미소를 짓던 밤. 만약 별이라는 것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이 아이의 눈망울과 똑같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뇌리를 스쳤었다. 어쨌든, 참말로 윽박지르기도 뭣해진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뭐 해?'밖에 없더라. 제 얼굴에 묻어 있던 시뻘건 피――아니 케찹을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내며 '죽음 연습이요.'라 태연하게 대답하던 그의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없을 것 같군요."
  그로부터 네가 웃으며 한 문장을 더 꺼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기억에 없다. 분명 내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을 법한 한마디였던 것 같은데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다. 혹시 선별인원 중에 타인의 기억을 삭제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있었던가. 아니면 불필요한 영상이라 판단하여 뇌가 스스로 삭제해 버린 건 아닐까. 끝까지 해답이 안 나오자 나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거머쥐었다. 손 틈을 타고 빠져나온 투명하게 푸른 머리칼들이 '멍청이, 멍청이.'라며 날 우롱하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은 온통 새하얘져 이제는 눈앞까지 희미하고, 그렇게 나는 어딘가에 홀린 듯, 조금씩 정신을 놓았다. 옛날부터 그래왔듯이 내 모든 결말의 무대는 후회의 바다다.  

  영원히 내 옆을 지켜줄 것만 같았던 친구가 이제는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옆으로 고개만 살짝 돌리면 언제나 환히 웃으며 날 바라보던 친구가, 친구가,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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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21] [로스알바] To.핀언니

 

 

  입을 맞춘다는 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가.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따스한 체온을 입술로 느낄 수 있다는 건 참말로 기발한 생각인 것 같다. 키스라는 애정표현 방법을 떠올려낸 사람은 어디 사는 누구인가 싶었던 것이, 입맞춤은 그런 원시적인 부분에서부터 나를 깊은 생각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조금 유치하긴 했지만.

 

  우리는 주변에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 척박한 황무지를 그저 무료하게 걷고만 있었다. 밀려오는 심심함에 지루함을 달래 줄만한 것이 무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 만목황량한 땅 위에서 그런 오락적인 걸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차라리 귀엽던, 포악하던 몬스터 한 놈이라도 튀어 나오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거기서 더 나아가자면, 빨리 그 마왕인가 뭔가 하는 녀석을 잡아서 죽음의 구렁텅이에 갖다 바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영악한 생각이 몇 번 뇌 속을 쑤시고 지나가던 와중에, 이상하게도 내 앞에서 계속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용사의 등판이 자꾸 눈에 밟혔다. 심심한데 저 등을 뒤에서 발로 한 번 뻥 차 볼까나. 그러면 저 깐깐한 용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내게 보일까. 아픈 등에 손을 갖다대고 바락바락 소리치며 도끼눈을 뜨고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볼까, 아니면 눈가에 투명하게 눈물을 머금으며 입술을 깨문 채로 내 발을 원망스럽게 째려볼까. 생각해 보니 두 상황 다 결론적으로는 날 쏘아보고 있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머릿속으로 그 표정들 하나하나를 상상해 보니 제법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녔다. 나는 한 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며 무릎을 약간 굽혔다. 준비 자세였다.

 

 "아."

  불현듯이 무언가가 뇌리를 팟 하고 스쳐 지나감이 똑똑히 느껴졌다. 사실 이런 새디스트적인 행동에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질려 가고 있던 나에게 새롭게 떠오른 나름 신선한 생각이었다. 며칠 전부터 끊임없이 뇌 속을 후벼파고 들던 고민, 덕분에 머리가 지끈지끈했던 그것을 용사 씨에게.

 

 "용사 씨."

 "응?"

  늘 그렇듯이 '알바'가 아닌 '용사 씨'라는 호칭으로 그를 부르자마자 몇 발짝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소년은 마치 말 잘 듣는 개 마냥 고개를 홱 돌리며 그 맑은 눈빛을 내게 꽂는다. 멍청해 보이긴 하지만 또 그만큼 순수하다.  

 

 "심심한데 뭔가 재밌는 거 필요하지 않아요?"

  그에게 던질 첫 마디에서는 무조건 본심을 숨겨야 한다. 저리 맹한 얼굴로 다니긴 해도 생각보다 약삭빠른 면이 있는 용사가 '혹시 또 이상한 걸 꾸미고 있는 거 아냐?'하는 투로 내게 되물으면 조금 곤란하니까.

 

 "재밌는 거?"

  다행히도 위기는 넘겼다. 이 소년은 생각 그 이상으로 아둔한 모양이다. 나로써는 편해서 좋지만.

 

 "잠깐만 가까이 와 봐요, 괜찮은 게 떠올랐거든."

  그 '괜찮은 것'이라는 건 사실 며칠 전부터 계속 내 머릿속을 정신없이 맴돌고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지금 막 떠오른 척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참 멋있는 연기다. 말을 끝내고 팔을 앞으로 살짝 내밀어 손 끝을 가볍게 까닥이니 바보같은 용사는 의심하는 기색은 전혀 없이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하나, 둘씩 내딛는다. 순진함과 헷갈릴 것 같은 그 미련함에 풉, 하고 그만 웃음을 내보낼 뻔 했지만 어찌어찌 참았다. 조금씩 가까워진다. 팔을 뻗으면 그 말랑말랑한 뺨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숨을 내뱉으면 따스한 입김이 얼굴에 느껴지는 거리까지. 그렇게 우리의 거리는 점차 좁혀졌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 입술.

 

 "있잖아요."

  나의 끈적한 눈빛을 과연 그는 알아챘을까. 아니, 표정으로 봐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다행이다. 덕분에 더 즐거운 반응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용사의 말간 눈망울에 내 얼굴이 얼핏 비쳤다. '어떻게 하면 눈이 그렇게 맑습니까?'라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기껏 만들어 놓은 이 분위기가 한순간에 와장창 깨져 버릴까봐 그냥 관뒀다. 허리를 살짝 앞으로 굽히자 그의 엷은 앵둣빛 입술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핏물이 스며든 것 같아 소름끼칠 정도의 섹시함을 연출하는 새빨감도, 분홍의 장미꽃과 닮아 있는 사랑스런 분홍도 아닌 그저 어정쩡한 색이었지만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나는 이런 입술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잠깐의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계속되는 응시에도 질려가던 참에, 순결로 가득찬 그의 살짝 열린 입술을.

 

 "앗."

  재빠르게 용사의 목을 휘감는 나의 팔에 그가 내게 반격을 할 틈은 없었을 테다. 겹쳐진 입과 입, 그 짧은 순간 덕분에 깜짝 놀라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망울. 그 눈이 참말로 귀여워서 당장에라도 손을 번쩍 들어 엷은 갈색빛 머리칼을 마구 쓰다듬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지금 아래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무방비 상태인 이 입술 사이에 내 혀를 집어 넣고 그대로 돌진? 아니면 계속 이렇게 뜨뜻한 마찰만? 어느 쪽을 선택해야 더 즐거울까. 즐거움, 즐거움, 즐거움. 그게 내 키스의 본 목적이었다. 과연 용사는 전자를 원할까, 후자를 원할까. 아니 것보다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서의 입맞춤이라니, 이거 나름대로 로맨틱한걸. 아, 말을 걸고 싶어. 살면서 이런 경험 한 번도 못 해봤을 안쓰러운 용사에게 '처음 치고는 괜찮았나요?'라 잔뜩 비아냥거려주고 싶어. 지금 얼굴을 잔뜩 붉히며 여전히 눈을 치켜뜨고 날 매섭게 바라보고 있는 이 반응도 나름 재밌지만, 그 말을 했을 때 돌아올 반응이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어쩔까? 어쩔까? 지금이라도 '서프라이즈!'하고 소리치며 입을 뗄까?  

  그러던 와중.

 

 "뭐, 뭐야!" 

  아뿔싸. 먼저 내쳐졌다.

  수줍게 미간을 찌푸린 용사의 양손에 밀려 본의 아니게 몇 발짝 뒤로 물러나버린 내가 조금 안타까웠다. 역시 고민은 깊게 할만한 게 못 된단 말이지. 방금까지만 해도 내 입과 밀착해 있었던 아랫입술을 앞니로 살짝 깨물며 씩씩거리고 있던 용사는 지금 화가 상당히 많이 난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조금 뿌듯하다.

 

 "재밌었어요?"

  아까 하고 싶었던 말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얄미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이번에도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줄까? 

 

  어, 잠깐만. 용사 씨, 어디 가요? 즐거운 대답은? 흥미진진한 표정은? 지금 얼굴 완전 빨개진 상태로 뒤돌은 거 맞지? 잠깐만. 기껏 키스했더니 고작 이거밖에 없어? 정말로? 뭐야. 기대를 잔뜩 하게 했으면 얼른 날 재밌게 만들어 줘야지. 설마 이거로 만족하라는 소리야? 아니, 저 용사가……? 

  결론은,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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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사콘] [130814] 너에게 마지막

 

 

 

  누군가가 일부러 하늘에서 벚꽃잎을 바구니 채로 마구 쏟아붓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교정이 떠나갈 듯 울려 퍼졌던 아쉬움과 축하가 뒤섞인 박수 소리는 꽃잎과 함께 허공을 타고 흘러가던 건들바람과 같이 사그라들었다. 아직은 칼날처럼 소름 돋는 차가움을 가득 품고 있던 그 바람의 조각이 6학년, 아니 이제는 단 몇 분 만에 인술학원의 졸업생이 된 두 아이의 잔뜩 빨개진 뺨을 살짝 베듯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막 인술학원을 나와 교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머지 두 아이는 가슴 찡했던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눈물을 삼키며 짧은 작별인사와 함께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고, 이제는 남은 그 둘이 떠날 차례였다. 방금 전에 6년의 생활을 마무리짓는 졸업식도 끝났고, 그와 더불어 엄청난 박수갈채도 잔뜩 받았으니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자신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했다. 인술학원이라는 틀 안에 굳게 갇혀 있던 그런 고립된 삶이 아닌, 스스로가 설계해야만 하는 그런 인생 말이다. 그런 점에서의 졸업이라는 건 참 해방적이고도 씁쓸했다.
  슬슬 꽃들이 겨울 내내 숨겨왔던 꽃잎을 깨워내고 있는 걸 보니 이제 계절은 확실히 봄이었지만 덜 따뜻해진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하.'하고 짧게 숨을 내뱉으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눈 앞에서 희멀건 작은 구름이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그 사실이 어이가 없던 사부로지는 흰 입김의 뭉치를 보며 허, 하고 간결하게 웃었다.

 "사부로지."
  야외였음에도 불구하고 확연히 느껴지는 어색한 고요함을 깨뜨리고 조용히 입을 여는 사콘. 그 모기만한 목소리를 사부로지는 그만 알아듣지 못 할 뻔했다.

 "어?" 
  그리고 사부로지의 대답은 늘 불친절하고 짧다. 6년 전에도 그랬고, 또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점만은 한결같았다.

 "우리……"
  사콘의 목소리는 아닌 듯 하면서도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눈물이 떨어지기 전의 그런 떨림이었다.

 "적으로 만날 수도 있을까?"
  마지막 문장은 목 속에서 흐르고 있는 아픈 눈물 아닌 눈물들 덕분에 거의 알아듣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그가 뒤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사부로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살짝 떨구고 있던 시선을 위로 치켜들어 올려 허공에 맞추는 사부로지.

 "당연하지."
  그 잔인하고 안타까운 현실을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수긍한다. 그 솔직한 대답에 차마 무어라 할 말이 사라져버린 사콘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기만 하고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또 찾아온 정적은 그들이 이 뒤에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고민하고 있는 시간과도 같았다.

 "뭐, 이제 볼 일도 없겠구만?"
 "아마 그렇겠지."
  사콘과 사부로지는 고개가 아닌 시선만을 살짝 돌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표정에 발그스름한 색깔. 얼핏 봤을 때 약간 닮았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모습들이었다. 외형이 아닌 느낌이 말이다.

 "그러면 나, 하고픈 말이 하나 있는데."
  갑자기 사부로지가 사콘의 뺨을 또렷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 낮게 깔린 목소리는 때 아닌 긴장감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뭐?"
 "앞으로 볼 일 없을 거라며. 그러니까 할 말은 하려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라도 하는 듯이 둥그런 눈망울을 요란하게 몇 번 깜빡이는 사콘. 여태까지 함께 지내오며 사부로지가 이렇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저런 진지한 말을 내뱉는 것을 본 기억이 사콘에게는 전혀 없었다. 자신과 그가 한 말대로 이제 서로 얼굴을 맞대는 일도 적을 테고, 언제 어떻게 또 만날 지 모르는 친구의 마지막 고백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는 전혀 만무했기에 사콘은 사부로지가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동자는 봄빛과 닮아 있어 맑았다. 그 초롱초롱한 눈을 꾹 눌러 감으며 숨을 들이쉬는 사부로지.

 "오래 전부터 너를."
  긴장감이라는 이름의 굵은 실이 그들 사이를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좋아하고 있었어."
  '좋아하고 있었어.' 좋아하고 있었어, 좋아하고 있었어. 좋아해. 좋아했어. 좋아……. 놀람으로 잔뜩 커지는 눈망울. 말이 끝난 사부로지의 입이 다시 닫히자마자 사콘의 머릿속은 여러가지 형태의 '좋아.'로 가득찼다.
  좋아해? 좋아한다고? 좋아해, 좋아했었어…… 응, 그러고보니 나도.

 "잠깐만. 사부로지!"
  그가 다시 넋을 되찾았을 때 사부로지는 이미 등을 돌리고 제 갈 길을 떠나려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자신의 외침에도 멈추지 않는 그 눈에 익은 몸뚱아리가 참말로 매정해서 사콘은 그만 울컥했다. 그렇게 몸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무슨 한이 있더라도, 저 고백을 들은 이상 이 말은 꼭 해야만 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너만 좋아했던 건 줄 알았어? 나, 나, 나도 너를……!"
  15년 살면서 한 번도 내뱉어보지 못 했던 말이 이상하게 지금따라 술술 잘 나왔다. 마지막 마디에 앞으로 계속 향하던 사부로지의 등이 멈춰섰다. 너를, 너를.

 "좋아한단 말이야, 바보같은."
  그 목소리는 굉장히 작았다. 바로 옆에 사람이 있었더라면 아마 그 사람도 알아듣지 못 했을 만큼의 음량이었다. 사콘은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창피함과 안타까움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주먹 쥐고서. 사부로지는 끝의 한 마디를 듣지 못 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래뵈도 6년간 함께 지낸 룸메이트이기에 가능한 마법이었다. 사부로지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길 한가운데서 우뚝 멈춰선 채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멍하니 초점을 맞추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입 속에 고여 있던 타액을 목으로 꿀꺽 넘긴다.

 "사콘."
  아까보다 훨씬 낮아져 있던 목소리였다. 그랬기에 더욱더 또렷하게 귓 속을 찌르고 들어온다. 사콘은 떨궜던 머리를 서서히 들어올렸다.

 "설령 내가 널 적으로 만난다고 해도…… 난 널 공격하지 않을 거야."
  그 한 마디에는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여러가지 감정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할까, 굳은 결심이라고 할까. 사콘의 눈이 사부로지의 머리를 향할 때 즈음, 그 새까만 구슬같은 눈망울은 투명한 액체 한 방울에 젖어 있었다.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지만 확실히 분노의 의미는 아니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 짧고 굵은 세 글자는 어찌나 사콘의 마음을 잘도 후벼파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허공을 향해 들어진 눈동자와 그 들어진 눈동자를 만나고자 하여 뒤돌은 눈동자가 서로 만나자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 아닌 웃음이 동시에 피었다. 쓸쓸함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슬픔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제 와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그 아쉬움을 서로를 향한 미소로 승화시킨다.
  마지막 순간에서 입술을 깨물지 말라. 눈물을 흘려야 마땅할 상황에서의 깨문 아랫입술은 되도 않는 자존심 세우기에 불과하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상대를 위해 한 번쯤은 필요한 짠내 나는 눈물의 시간.
  하늘에서 흐르는 연홍빛의 벚꽃은 그 눈물을 애써 가려주고 있었다.




[130726] [사부로지&사콘] 졸업 이후 낙서

 

 

 

 "카와니시 사콘?"
  금속과 금속이 서로 마찰함으로써 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핏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칼에 맞은 누군가의 안타까운 비명이 피바람으로 가득 찬 허공에서 한꺼번에 섞이고 있던 와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무 뒤편에 숨어서 자신과 다른 색의 닌복을 입은 적의 심장을 노리고 있던 닌자 한 명의 행동을 붙잡았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매우 익숙하고도 그리운 목소리에 지금 자신이 전쟁에 참전 중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모양인지 아주 잠시의 고민도 없이 자신을 부른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사콘.

 "사부로지?"
  그가 고개를 돌린 쪽에서는 매우 낯이 익은 실루엣의 닌자 한 명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살짝 삐죽거리는 앞머리에, 적당히 큰 키, 잘 기른 뒷머리. 어딜 보나 2년 전 졸업 이후로부터 연락이 끊겼던 그리운 친구, 사부로지였다.
  자신을 부른 이가 사부로지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된 순간 사콘은 친구와 재회했다는 사실에 들떠 반사적으로 쿠나이를 버리고 사부로지에게 달려갈 뻔 했다. 2년동안 소식이 없어 생사를 알 수도 없었던 그리운 친구를 이제서야 만났으니, 이건 당연히 기쁜 상황 아니겠는가.
  하지만 예상외로 그는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사부로지가 입고 있는 닌복이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이 심장을 노리고 있던 닌자의 닌복과 생김새가 같았다.


*


  두 사람 다 어느정도 상황 파악이 끝난 모양이었다. 처음 잠시동안 느꼈던 반가움은 온데간데없이 어느새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만이 감돌고 있었다.
  사콘은 고개를 살짝 들어서 한 때 단짝 친구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울창한 나뭇가지들의 그림자에 묻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사부로지는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는 쌀쌀맞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말로 슬프게도 지금 상황은 2년만의 재회와 상당히 어울리지 않았다.
적으로 만난 그들은 인사 한 마디도 없이 각자 자신의 무기를 끊임없이 쥐었다 놨다 하면서 내적 갈등만 계속 겪고 있었다. 저 자는 과연 적인가, 아니면 나의 그리운 친구인가.
  그러던 와중, 갑자기 그들의 옆에서 보록화시 하나가 펑, 하는 굉음을 내며 터진다. 자욱한 회색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한 번 '에취!'하며 기침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이러고 있다가는 분명 둘 다 죽어."
  입 속에 감돌던 긴장감 섞인 타액을 꿀꺽 삼킨 후 여전히 한 손으로는 쿠나이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콘이 무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럴 것 같네."
  그러자 건너편에서도 똑같이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응."
  마지막 대화가 끊기고, 가죽 칼집에서 장검이 뽑히는 섬뜩한 소리와 여러 개의 쿠나이가 제들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그리고 서로에게 달려드는 발소리만이 핏빛 허공을 울린다.


  죽임을 당하는 자도, 죽이는 자도 비명을 지르는 전쟁이라…….






[130717] [로지사콘] 무제

 

 

 



  또 네게 상처를 냈다.
  늘 생각해오는 거지만, 내가 너를 해하는 데에 별다른 사연은 없다. 굳이 이유 몇 가지를 대 보자면, 오늘은 도서위원회가 단체로 밤 늦게까지 도서관의 책들을 정리하는 날이었고, 아무도 바깥을 어슬렁거리지 않는 늦은 밤이었으며, 날 가만히 올려다보는 네 말간 눈동자가 오늘따라 슬프게 보여서였을까. 만약에 누가 지금 내 머릿속을 읽고 있다면 분명히 미쳤다며 혀를 차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동화스러운 일은 없으니 상관없다.
  단순했다. 내가 꽉 쥔 주먹을 든 이유는, 품 속에서 쿠나이를 꺼내들어 사납게 협박을 한 이유는, 눈을 부릅뜨며 널 내려다본 이유는,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던지간에 아랑곳없이 험한 말을 내뱉은 이유는 참말로 단순했다.
  네 그 옥구슬같은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떨어졌으면 했기 때문에.

 "사콘."


  내 목소리가 방 안에 가득찼던 적막을 깨뜨렸다. 눈을 가만히 내리깔자 너는 마치 비에 젖은 고양이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겠지, 갑자기 덤벼들어 자신을 공격하는 룸메이트를 그 어떤 누가 고운 얼굴을 하고 볼 수 있을까. 나같아도 무서워했을 것이다. 당연한 거야.
  하지만 이렇게 합리화를 시도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 싸하게 들더니 갑자기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너, 지금 날 무서워하는 거야? 왜지? 우린 친구잖아? 어째서 그렇게 시선을 피하고 앉아 있는건데? 내가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끔찍해?'


  차마 내뱉지 못하고 머릿속만 뱅뱅 맴도는 말과, 의도하지 않았는데 또다시 올라가는 손. 그러던 와중에 잔뜩 붉어져 있는 너의 뺨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광대뼈가 유난히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언가 싶어 자세를 바꾸지 않고 위에서 그 붉은 얼룩과 같은 것을 계속 바라보니, 피멍이었다.
  나는 손찌검을 휘두르려 위로 들었던 손을 네 오른쪽 광대뼈에 살짝 가져다 댔다. 상처에 손 끝이 닿으니 쓰린 감촉이 아파서인지, 내가 두려워서인지 모르겠지만 네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모를 줄 알았겠지만, 넌 딱 봐도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파?"


  너무나도 당연한 걸 물어보자 넌 고개를 살짝 떨구고는 머리를 아래위로 가볍게 끄덕인다. 그 작은 행동은 기가 잔뜩 죽어버린 새끼고양이와 닮아 있었기에 나름대로 귀여웠다. 그렇게 네 얼굴 위에서 잔뜩 부어오른 피멍을 살살 어루만지니 그 쓰라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온 감각기관을 통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이질적인 감각에 아주 잠깐동안 네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도 잠시였다.

 "너, 울지 않아?"


  감정이 실리지 않은 내 한 마디에 갑자기 아무런 미동도 않는 너. 그런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장 큐사쿠가 와 주었으면' 하는 생각? 나에게 달려들어 이로 내 팔을 물어뜯을 생각? 아니면, 죽고 싶다는 생각? 어느 쪽이던 상관없다. 그것이 어떤 묘안이던간에 어자피 허구들에 불과하니까.
  꼴에 제도 남자라고 혀를 씹어가며 겨우 울음을 참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네가 눈물을 보일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누가 이기나 한 번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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