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301] [청흑] 2인 합작 청흑

 

 

  널어 두었던 청바지를 빨랫대에서 걷고 나서야 어제 세탁기에 여러 옷가지를 한꺼번에 넣어 빨래한 것을 후회했다처음 샀을 때의 치수가 몇이었는지 가늠조차   없을 만큼 잔뜩 늘어난 바지가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펄렁거렸다. 이걸 과연 입을 수는 있을까, 싫증이  나는 그것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만약 어제 네가  집에 있었더라면 잔뜩 뒤엉킨 세탁물들을 세탁기 안에 한꺼번에 집어넣으려 하는 나를 단호하게 말렸었겠지땅에 힘없이 너부러진 청바지를   흘겨보고는 그대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그래말렸겠지분명……. 슬프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일이라고는 높은 천장을 바라보며 맥없이 웃는 것밖에 없었다.

  네가 나를 떠난 지도 어언  달이 지났다  아니 달이 맞나내가 정신이 나가서 그저께 일어난 일을   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아닐까?
  어쨌든 그때의 너와  사이에서 흐르던 기류는 굉장히 살벌했었다여태까지   번도 크게 싸운  없는 사이라곤 믿을  없을 정도로 으르렁대며 다퉜었지

 

 

 


  처음 네가 집을 나가버렸을 때의 나는 그야말로  만난 고기나 다름없었다헤어짐의 슬픔 따위를 느낄 틈은 없었다 시절에는 오직 '놀자!', '즐기자!'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냄새가 싫습니다.'라는 너의 단언으로 인해 마지못해 끊었던 담배를 오래간만에 물어보기도 하고친구를 통해 알게  여러 여자를 품에 끌어안기도 했다. 또 뭘 했었더라. 이것 외에도 저지른 짓들은 끝도 없이 많은데 막상 떠올리려고 하니 어째선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각종 유흥에  빠져 있던 나는 제법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아니사실  따위야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었다현관문을 열고 '다녀왔어.' 말해봤자 반겨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무미건조한 집이 뭐가 좋다고그렇게 하루하루를 바깥에서 살던 내가 집안 사정을  리가 만무했다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큼직한 짐이 없어지든수납장 위에 올려 두었던 갈색 액자 속에  사진이 갈기갈기 찢겨 형체를 알아볼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리든 나로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  사실을 깨달은 것도 고작 얼마 전이었다. 깨진 액자의 유리 조각에 너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붉은 피가 굳어 있었다는 건 그저껜가 그끄저께에 알게 됐고.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애써 모른 척했다

  슬슬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귀찮아졌을 무렵, 나는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자고 가도 상관없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나서 주변 사람들을 텅 빈 집 안으로 잔뜩 불러들였다. 덕분에 고독함으로 가득 차 있던 집 안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고, 그와 동시에 씁쓸하고 어지러운 알코올 냄새가 실내에서 한가득 진동했다. 그렇게 며칠간은 정말 즐거웠다. 평생 이렇게 놀 수 있다면 삶이라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했었다.
  하지만 그 미미한 행복마저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했다. 며칠간의 유희를 계속 즐기던 나의 친구들은 '여자친구 때문에', '너도 피곤하지 않겠냐', 라는 등의 명분을 대고서는 차차 하나둘씩 자신의 터로 돌아갔다. 그렇게 마지막 남아 있던 한 명마저 '다음에 보자.'라는 말과 함께 현관문을 밀고 떠나갔을 때,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혹시나 너로부터 문자 한 통이라도 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종종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곤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다. 모두가 떠나간 지금 내 핸드폰에 쌓이는 거라곤 시답잖은 스팸 문자들밖에 없었다. 씁쓸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참하게 깨진 유리 사이사이에 흩뿌려져 있는 사진 조각들을 수많은 쪼가리 사이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발견한 이후로부터는 뱃속에서부터 무어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부글부글 끓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기 얼굴은 아주 세상에서 없어져도 될 존재라는 듯 갈기갈기 찢어 놨으면서, 어째서 내 얼굴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걸까, 너는

  분노와 후회가 머리끝까지 솟았고, 그렇게 며칠간 또 술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냈다. 만나봤자 별 위로 안 되는 한심한 친구들도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다들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 버렸다

 

  그렇게 반쯤 죽은 삶을 살던 와중, 언제였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딱 한 번 그리움과 슬픔을 담아 너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과연 네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사랑한다'? '미안하다'? '돌아와 줘'? 글쎄. 아직도 잘 모르겠다.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살아는 있는지, 밥은 잘 먹는지. 그런 간단한 안부를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날 떠난 지금은 과연 얼마나 행복한지 궁금했던 건 아닐까. , 그런 잡다한 고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발신 버튼을 꾹 누르고 나서 몇 초 후에 들려오는 소리는 평범한 통화 연결음 이 아니라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그 순간 딱딱한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너의 이름만을 애타게 외쳤다. 이미 잔뜩 늦어 버려 놓고서는

  나는 또다시 폐인이 되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네 흔적이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푹신하다며 네가 좋아하던 소파, 네 입속을 들락날락한 전과가 있는 수저, 너와 함께 밥을 먹던 식탁 등등 내 주변에서 너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은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들에 시선을 맞출 때마다 괴롭게 떠오르는 네 뒷모습. 그래, 너를 떨쳐 버릴 방법 따위가 나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처음 시작은 소소한, 그 어디서든지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말싸움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갈라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만약 내게 과거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잠깐 주어진다면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네가 떠나가기 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는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면서 싹싹 빌겠지. 하지만 슬프게도 옛날의 나는 굉장히 멍청했다. '이렇게 조금 싸우다가 몇 시간 후면 풀리겠지.'라는 오만한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아둔했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공방이 지속되자, 결국 참다 참다 못한 네 입에서는 여태껏 들어본 적도 없는 저주스런 악담들이 한바탕 쏟아져 나왔다. 문장들 사이사이 험한 욕설도 조금씩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내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내세웠고, 그 결과. 너의 증발.  

  다른 수많은 저주 사이에서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한마디가 있다. '정말이지, 당신이라는 사람 더는 봐줄 수가 없어. 앞으로도 평생 그리 살다가 썩어 문드러지면서 고통스럽게 죽어 버리길 바랍니다.'. 그 비참한 말마저 '어차피 곧 풀릴 거면서.'라 시답지 않게 받아친 나를 너는 얼마나 증오하고 있을까?
 

  그로부터 한 20일 정도 지났을 때, 나는 더 이상 네 웃는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떠오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마저 기쁘게 만들어 주던 그 행복한 표정을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마음에 수납장 위에 올려져 있던 액자를 무심결에 찾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설마 너는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너를 갈구하게 될 줄 알고 자신의 기쁜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 건가. 대단한 걸, 네 계획 대 성공이다

  나는 네 체취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소파 위에 털썩 앉아 너와 함께였던 과거를 곰곰이 되새겼다.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그러고 보니 네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 건 과연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처음 동거를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 둘은 굉장히 행복했는데. 신혼부부 못지않은 달콤한 삶을 꿈꾸기도 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그래. 확실히 네가 이 집을 나간 건 어떻게 보면 정말 당연한 일이다. 나 같은 녀석의 장단을 맞춰 주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너에게 저지른 만행들이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죄책감이 잔뜩 물밀려 들었다. 널 비참하게 만들고 결국 떠나보낸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그 쓰디쓴 악결과를 힘들게나마 받아들였다.

  그런 암담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카가미였다. 순간적으로 네가 돌아온 게 아닐까 하는 희망에 입안소리로 '테츠?'라 중얼거렸지만, 반갑게 문을 열어주자마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날아오는 괴팍한 주먹은 절대로 너의 것이 아니었다.  

 

 "미친 자식 같으니라고. 너 여태껏 무슨 짓을 하고 산 거냐?" 

  맞은 뺨의 얼얼함을 달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는 눈을 부릅뜨고 내게 폭언을 내뱉었다. 그리고서는 '너 같은 녀석한테는 인간의 자격도 없다.', '네가 무슨 잘못을 한 건지 감이 오기는 하냐?'라 소리치며 얼떨떨하게 서 있는 나를 향해 계속 주먹을 꽂았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눈알을 부라리며 당장 상대방에게 달려들었겠지만, 그때의 난 그 어느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아니 대관절 자격이 없었다. 카가미의 일침들은 죄다 옳은 내용으로만 가득 차 있었으니까

  이후로도 난 카가미에게 몇 대를 더 맞았고 결국 바닥에 완전히 뻗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그는 '.'하며 혀를 한 번 세게 차고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집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냐?" 

  카가미는 베란다 쪽의 창문을 활짝 열며 나를 향해 구박하듯 소리쳤다. 역겹게 풍겨오던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허공에서 지워짐과 동시에 얼음장같이 찬 공기가 실내로 잔뜩 날아들어 왔다. 이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신선함인가 싶었다. 나는 신발장 앞에 힘없이 드러누운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냥 잠깐만이라도 쉬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주방에서부터 솔솔 풍겨 오는 음식 냄새에 정신이 들었다.  

  내가 눈을 뜬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었다. 싱크대에 가져다 놓기 귀찮다는 이유로 다 먹고 나서도 식탁 위에 계속 올려 두었던 라면 냄비도, 거실 바닥에 멍청하게 벗어 놓은 각종 옷가지도, 조금만 더 쌓으면 조그마한 산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잔뜩 솟아 있던 재떨이 위 담배꽁초들도, 수납장 옆에 고이 모셔 놓았던 깨진 유리와 사진 조각들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가 정녕 내가 살던 장소?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깼냐?" 

  그 와중에 짜증스러운 얼굴을 지은 채 부엌에서 걸어 나오는 카가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잔뜩 피어오르던 여러 망상 속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 그렇구나. 역시 저 녀석이 다 치워버린 거구나

 

 "다음에 왔을 때에도 이렇게 멍청하게 살고 있으면 그땐 진짜로 죽일 테니까." 

  뭘까. '다음에 왔을 때'라는 건 언젠간 또 오겠다는 소리인가.  

  한 일 분 정도 넋이 나가 있던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지금 당장 저 녀석을 붙잡아서 네 안부라도 물어봐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카가미는 이미 현관문을 열고 집을 떠나간 지 오래였다. 굳게 닫힌 현관문만이 내 시야를 막고 있었다

  이번에도 결국 이렇게.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제 나는 스스로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했다. 스스로, 스스로라는 말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카가미가 깨끗하게 청소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워지지 않은 너의 흔적이 집 안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그냥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너에게 집착하며 축생 같은 삶을 살아가다가는 정말 네가 말했던 대로 썩어 문드러지다가 비참하게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건 여담이지만, 어제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핸드폰을 들어 다시 한 번 더 다이얼에 네 번호를 입력해 보았다. 처음 전화를 걸었던 그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내가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잔뜩 떨리는 손가락으로 발신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 너머로 들려 올 소리만을 기다리니,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역시 영락없었다. 잠깐이라도 기대감을 품었던 나 자신이 너무나도 멍청하게 느껴졌기에 힘없이 웃으며 핸드폰을 소파 위로 가볍게 던져 버렸었다

 

  벌써 한 달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네가 떠나기 전, 종종 농담 삼아 말했던 '난 테츠 네가 하루라도 없으면 죽어 버릴지도 몰라!'라는 낯간지러운 문장을 되새겼다. 역시 말은 함부로 내뱉는 게 아니로군. 네가 떠나간 지 하루는커녕 무려 30일이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다. 내가 존재하는 이 장소는 천국이 아닌 바로 우리 집이다. 비록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할지라도 아직 죽지 않았다. 그래,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카가미가 나를 때려 팼던 그 날처럼 나는 누워 있다. 만약 네가 지금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면 과연 너는 내게 무슨 말을 해 줄까. 이제서야 조금 사람처럼 변했는데,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주지는 않을까?  

  실현되지 않을 망상을 가득 펼치며 팔을 눈 위에 얹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