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128] [아베미하] To. 레몬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재미없고 유쾌하지 못한 일이라 아베 타카야는 생각했다. 어렸을 때 전등에 붙여 놓았던 별 모양 야광 스티커만이 무료한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렸을 때만 해도 항상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야광색 별의 개수를 세며 잠이 들었었는데 막상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지금 저것들을 보고 있으니까 연초록빛 성단이 어찌나 거슬리는지 당장 일어나서 스티커를 처참히 뗀 다음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었다. 그러고서 다시는 빛나지 못하도록 휴지 더미로 꽁꽁 싸매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지금 잔뜩 돋구어져 있는 성질이 풀릴 것만 같았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위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베는 얼굴을 조금씩 일그러뜨리더니 결국 소리만 들어도 고통스러워 뵈는 기침 한 번을 크게 뱉어냈다. 

 "젠장, 그 녀석이 계속 코를 훌쩍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아베는 애꿎은 전등만 죽일 듯이 노려보며 한탄했다. '내 인생이 이렇지, 뭐.' 라 작게 구시렁대는 입안소리가 사뭇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한 번 더 기침을 크게 내뱉었다.
  어젠가 그저께까지만 해도 그의 몸은 굉장히 멀쩡했다.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재채기를 심하게 해 대지도 않았고, 어질어질한 머리 덕분에 밥을 먹다가 뒤로 고꾸라지는 괴기스러운 일도 없었다. 아베가 지금 콱 막힌 코를 자꾸 훌쩍이며 갑갑한 숨을 겨우 들이마시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같은 니시우라 고교의 야구부원인 미하시일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며칠 전에 아베와 미하시가 입을 맞추었으니까.
  말로는 아베'와' 미하시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따져 놓고 보자면 엄연히 아베의 독단으로 행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랑이니 행복이니 하는 예쁜 감정들에 서툴었던 어느 남고생의 시답잖은 질투심이라고 해도 좋을까. 어쨌든 아베는 투수 연습이 끝나 지칠 대로 지쳐 그야말로 무방비 그 자체였던 미하시의 입술을 훔친 전과가 있었다. 상대방의 의도랑은 전혀 상관없이.

 "윽."
  아베는 머리가 또다시 아파 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깊은 잠에 빠지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고 점심식사 후에 먹었던 약발도 떨어진 지 오래였다. 아베의 한탄 담긴 한숨 소리가 텅 빈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침대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벽걸이 시계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 동안 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벌써 시계침은 오후 5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때쯤이면 애들은 하교하고 있겠지, 오늘 야구부 포수는 누가 맡았으려나. 역시 타지마?'하는 생각이 아베의 텅 비어 있던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다.

 "타지마라……."
  침대 가장자리에서 홀로 놀고 있던 팔 한쪽을 자신의 뜨뜻한 이마 위에 얹으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타지마는 미하시와 친했다. 누가 봐도 '둘은 단짝이야?'라 물을 정도로 친했다. 아베는 언제나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그들이 친하게 지내든 말든 관심조차 없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점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타지마와 미하시가 붙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영 신경에 거슬렸다. 머리를 쓰다듬는다든지 볼이 말랑말랑할 것 같다며 쿡쿡 찔러 본다든지, 하는 행동들이 평범한 친구 관계에서, 것도 남자끼리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스킨십이었던가. 하지만 실제로 니시우라 야구부에서 그런 그들의 우정을 지적한다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아베는 가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내가 비정상인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집단이 비정상인지 사이에서.

  그러한 이질적인 감정이 말로만 듣던 질투심이었다는 것을 그가 깨닫기까지에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베는 그 잘난 두 사람의 우정이라는 것에 굉장히 속이 쓰렸고, 결국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미하시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 행동은 애정이나 연모 따위의 풋풋한 감정보다는 소유의 느낌이 훨씬 강했다. 
  너는 내 투수고, 너는 내 파트너이며, 너는 내 거야. 아무한테도 주지 않아. 맞닿아 있던 입을 살짝 뗌과 동시에 아베는 미하시가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음량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잔뜩 경직된 투수에게 아까와 같은 행동을 다시 취했다. 아무리 타지마라도 키스를 할 생각은 절대 못 했겠지, 내심 혼자만의 승리감에 푹 빠져 있었던 그였다.


  아베가 한 번 더 크게 기침을 뱉어냈다 ー 아니 그냥 게워냈다고 표현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지금 아무 알약이나 입안에 털어 넣고 그 탁월한 수면 효과의 힘을 빌려 다시 잠이나 자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는 복부까지 내려가 있던 두꺼운 솜이불을 자신의 턱까지 끌어당겼다. 별로 따뜻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때 방문을 똑똑, 하고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가볍게 두 번 울렸다.

 "타카야, 친구 왔다."
 "엑?"
  아베의 그 모습은 흡사 아침에 학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초등학생과 같았다. 뜬금없는 말에 그는 약간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약간 불쾌감이 담긴 짧은 의문 감탄사를 뱉었다. 친구고 뭐고 빨리 잠이나 자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환자 신세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가족 이외의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였을까. 아베의 어머니는 '자, 들어오렴.'하며 그의 친구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베는 자신을 찾아와 준 고마운(?) 사람의 얼굴을 이불 너머로 슬쩍 바라봤다.

 "아, 저, 아베, 군."
  듣기만 해도 타인을 갑갑하게 만드는 소심한 말투의 소유자, 다름 아닌 미하시였다. 아베의 어머니가 밖으로 나간 모양인지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림과 동시에 방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객에 당황한 그는 바로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앉았다.

 "뭐야, 웬일?"
  자꾸 드러나려고 하는 놀라움을 애써 감추고 싶었던 아베가 일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불친절한 음성에 크게 움찔하는 미하시에게 미안한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지금 본인이 병자 취급을 잔뜩 받고 있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원인에게 괜히 억지웃음 지으며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그는 미하시가 여기까지 찾아와 주었다는 사실이 내심 좋았다. 만약 계속 혼자 고요한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더라면 얼마 못 가 지루함이라는 이름의 늪지대에 빠져 그만 익사해 버렸을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 그게, 숙제가……"
 "숙제? 너 우리 반 아니잖아."
  멍청하긴, 거짓말을 하려면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해 왔었어야지. 아베는 어리석은 자신의 파트너를 마음속으로만 꾸짖었다. 그 와중에 정곡을 찔린 듯한 미하시의 잔뜩 굳은 표정은 아주 볼 만했다. 어느새 그는 양 검지를 들어 손가락끼리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용건이 있으면 얼른 말을 하지그래."
  사실 속으로 아베는 계속 웃고 있었다.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주어, 목적어, 서술어가 포함된 완전한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고 있지 못하는 미하시가 솔직히 말해서 귀여웠다. 그의 얼굴 근육은 자꾸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겨우 참아내느라 꽤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저, 그, 그게."
  얼굴이 무슨 가을날 단풍처럼 새빨개져서는 삼 초 정도 눈을 아래로 깔아 바닥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미하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아베 군이 감기에 걸린 게……"
 "아?"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을수록 미하시의 얼굴은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과도 같았다.

 "나, 나, 나 때문이 아닌가 해서……."
  그 말을 듣고서 아베는 잠시동안 벙져 버렸다. 솔직히 뜬금없지 않은가. 질투에 휩싸인 사람은 아베였고, 먼저 입을 상대방에게 가져다 댄 것도 아베였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서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 있는 소년은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는가? '나 때문'?

 "미, 미, 미."
 "……이봐, 너."
  '미안해'라 말하려던 미하시의 가냘픈 목소리는 마치 나온 적도 없었다는 듯 쑥 들어가고 아베의 불만 가득한 음성만이 적막한 방을 가득 울렸다. 아베는 한숨을 짧게 내뱉고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미하시를 향해 손을 가볍게 까닥였다. 됐으니까 이리 와봐, 라는 의미였다. 미하시는 당황에 찬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결국 친구가 앉아 있는 침대 앞까지 걸어갔다. 안 그래도 작은 몸집의 소유자가 어깨를 움츠리고 서 있어 더 작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아베는 가볍게 웃었다. 희소인지 고소인지는 그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별로 알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그저 드는 생각이라고는,
  아, 이 녀석. 귀엽네.
  아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베, 군?"
 "있지, 정말로 미안하다면."
  생략된 말, '너도 다시 걸리면 되지, 감기.'. 그 한 문장은 서로 맞춰진 입 덕분에 차마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시계는 5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초침이 세 바퀴를 돌면 그때 떼야지, 이제는 뜨거움의 수준을 넘어 거의 불타오르고 있다 느껴질 정도였던 미하시의 얼굴이 조금은 식기를 바라며 아베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내일은 내가 아닌 이 녀석이 학교에 결석하길 바라며.




[130113] [로스알바] To. 핀언니

 

 

  끔찍한 꿈을 꾸었다.
  처음으로 '꿈을 저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는 방금 전의 그 해괴한 꿈을 다시 회상하려고 무의식에 멈춰버린 머리를 쥐어짜려 애를 썼다. 평소에 꿈을 자주 꾸는 편이긴 하다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나 괴상망측하고도 불쾌한 꿈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뭐가 어쨌든, 잠자고 있는 동안에만 보이는 세계 속에서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늙어 가는 컨셉이었던 모양이다. 분명히 꿈의 시작은 지금 20대 초반의 내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젊음은 정말 짧은 시간에 불과했고, 컵에 담겨진 주스를 다 마실 수 있는 짧은 시간이 지났을 무렵,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았을 때의 내 얼굴은 이미 칠십 대 노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매섭기만 하던 눈가는 잔주름들로 가득한가 하면 똑바르게 펴져 있던 허리가 앞으로 굽기도 했고, 목소리도 잔뜩 걸걸해져 이십의 청춘은 먼 옛날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을 외모였다. 나는 꿈 속의 그, 혹은 나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시선은 나에게 '내가 불쌍하게 느껴지나?'라 말하는 것만 같았다.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리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사실 별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만약에 내가 정상적인 인간이었다면 저렇게 늙어 갔겠지', 하는 생각이 고작이었으니. 나는 허구로 가득한 내 모습을 바라보고서는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늙은이는 웃지 않았다.

  이야기가 여기서 깔끔히 끝을 맺었더라면 내가 '불쾌하다'는 평을 내릴 것 까지는 없었겠다. 티끌 한 점 보이지 않는 꿈의 흰 배경이 슬슬 깨지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이제 볼 건 다 봤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꿈에서 깨지 않았다. 막상 클라이맥스는 시작도 않았던 것이다.

  뭘까, 하는 짧은 생각은 할 틈조차 주지 않고서 바로 다음 장면이 펼쳐졌다. 과연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을까, 공백에 대해 의아스러움을 느끼려던 참에 누군가가 '꿈 속의 나'의 맞은편에 번쩍, 하며 나타났다ー아니 사실 어떻게 나타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다름이 아닌 나의 용사였다.

  잠시 흠칫하지 않았다고 하면 분명 거짓말이겠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모를 그의 얼굴과 포즈는 마치 증명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마냥 굉장히 시시했다. '멍청한 용사 씨의 성장 일기라도 보여줄 생각입니까?' 나는 마음 속으로 시비를 걸었다. 용사 씨는 마치 내 머릿 속 생각을 읽은 양 힘없이 실소만 짓고 말았다. 왠지 그답잖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그 상황에서 내가 할 가장 적당한 일은 가만히 앉아 알바 씨를 응시하는 것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방금 전 내가 변해갔던 것처럼 그에게도 무언가의 간간한 바뀜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용사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말랑한 얼굴에는 주름 하나 생기지 않았고, 허리는 매우 말짱했으며, 가끔씩 뱉는 '에……'같은 감탄사로 미루어 보아 목소리조차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장면은 계속 이어졌다. 10초가 지나고, 1분이 지나고, 또 몇 분이 더 지나도 그는 그대로였다. 성숙함과는 거리가 먼 앳된 소년의 풋풋한 모습, 꿈 속의 그는 이 세계에서 깨기만 하면 바로 만나볼 수 있는 그 현실 속 용사의 얼굴에서 변한 점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알 수 없는 괴리감이 날 엄습해온 것은 대강 이쯤부터였다. 원래 꿈이라는 녀석이 제대로 돌아가는 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때따라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나 할까, 기억이라는 이름의 유리창이 잽싸게 날아오는 웬 야구공에 의해 끔찍한 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부서져 버리는 기분이라고 할까.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시덥잖은 농담을 건넨다면 단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죽어.'라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심란했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둘러보는 알바 씨의 평범한 그 모습이 왜이리 무섭게 느껴졌던 건지 모르겠다. 금방에라도 사나운 괴물로 변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잔인무도하게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지쳐버려 힘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팔이 마치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듯 제 혼자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 댔고, 작은 칼집 안에 보관되어 있던 단검 한 자루를 살며시 꺼내 쥐었다. 다행히도 용사는 꿈 속에서마저 멍청했기에 내가 지금 무슨 행동을 취하려는지 아예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빠르게 끝내겠습니다, 이런 꿈.

 "전사……."
  갑작스레 들려오는 그 울음 섞인 짧은 부름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귀를 의심하며 시선을 그의 얼굴로 돌리니, 용사는 어느샌가부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일부러 얼굴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게 눈에 선히 보였지만 그조차도 얼마 못 가 곧이어 양손을 얼굴에 갖다 붙이고서는 서럽게 우는 것이 아닌가. 텅 빈 허공이 용사의 울음 소리로 가득 차자,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내 시선이 닿은 곳에 늙은 나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나무로 만들어진 기다란 관 하나만이 쓸쓸하게 놓여져 있었을 뿐이다.

 "하?"
  '나'는 죽었다?
  눈 앞의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늙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죽음? 누군가를 농락하는 것에 정도가 있어야지,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현실과는 너무나도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기에 기분이 영 좋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꿈이 끝나지도 않는다. 원래 꿈이라는 놈은 가장 재미있는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딱 끊겨 버리는 개구쟁이가 아니었는가? 심지어 지금의 나는 재미고 자시고 하는 즐거운 감정이라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끊길 줄을 모르는 용사의 통곡만이 빈 허공을 가득히 채웠다. 
  그 순간 눈물이라는 제목의 구슬픈 음조, 그 안타까운 멜로디에 속해 있던 마디 하나가 튀어나와 순간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아, 용사는 내가 죽으면 저렇게 슬피 울겠구나.
  절로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꿈 속의 '생명이 한정되어 있는 나'는 죽고, 용사는 운다. 그럼 반대로 현실에서는? 언젠가 용사는 나이가 들건, 우연한 사고가 발생하던 분명히 어떤 방식으로던지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러면 그때의 나는 용사를 위해서 슬프게 울 수 있을까? 지금 내 눈 앞에서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하고 있는 울보처럼 눈시울이 새빨개지고, 새어 나오는 딸꾹질을 차마 제어하지 못해서 계속 히끅거릴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유한한 생명의 종결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나 있을까?

 "……못 합니다."
  나는 입안엣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힘 풀린 손에서 단검을 떨어뜨렸다. 챙강,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전을 찌르고, 그와 동시에 눈물 자국 가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용사. 그 슬픈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나까지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나도 몇십 년 후에는 당신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코끝이 찡해졌다. 

  언제까지나 같이 남을 수 있다는 미련한 바람따위는 저버린 지 오래였다. 우리는 그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왕궁의 전사와 용사일 뿐. 그 페어가 인생의 동반자까지 발전할 리가 있겠는가. 애초에 우리는 서로 다른 운명을 지고 난 생명이거늘. 하지만 언제인가 나는 잠깐동안 기대해 본 적이 있었다. 우리가 같은 길을 걷는 것을, 우리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을, 우리가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을. 그런 소망 정도는 아무리 나라도 한 번 쯤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용사의 뺨을 나도 모르게 어루어만졌다. 눈물이 마르다 말아 찝찝한 액체가 손에 조금씩 묻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울 것만 같았기 때문일까. 감정이 급격하게 북받쳐 올라왔다. 나는 마치 접착제라도 바른 듯이 딱 붙어 버린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겨우 이별시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용사 씨. 나……"
  콰직.
  어딘가에서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가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효과음이 울려 퍼진 근원을 바라보니, 내 발 밑이었다. 방금 떨어뜨린 단검으로부터 웬 금들이 거미줄처럼 주욱 퍼져 나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은 발을 디딜 수 있는 부분이 없을 만큼 부서졌고, 나는 아무 저항도 못 해본 채 아래로 추락했다. 지금 처참히 파괴되고 있는 꿈 속 배경의 하얀 조각들이 떨어지면서 내 온몸을 긁고 베었다. 
  이상한 나라로 떨어지는 앨리스의 기분이 이랬을까. 나는 그 위험한 와중에도 용사를 찾으려 온 힘을 다해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검은 배경 위에 자잘하게 수놓아진 흰 조각들 뿐이었다. 어째서지? 용사가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서 있었고, 바로 앞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 하지만 내가 찾는 그는 나의 주변 어딘가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급속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던 나는 미친듯이 쏟아져 내려오는 조각들을 헤집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조금씩 위로 들기 시작했다.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올렸던 팔은 이미 피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흐르고 있어 아예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힘겹게 머리를 끝까지 뒤로 젖혔을 때, 비로소 하늘ー아니 내가 떨어져 내려온 공간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거기서는 무표정의 누군가가 차가운 얼굴로 나를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용사?
  그의 생김새를 정확하게 보기 위해 잠시 팔을 치운 순간, 사람에 정신이 팔려 알아채지 못했던 날카로운 조각 하나가 정확히 내 눈동자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차마 나는 그것을 피하지 못하였고, 그와 동시에 꿈은 끝났다.


  아직도 정신이 멍하다. 온몸이 굳어버려 침대 위를 떠날 기분이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의 섬뜩함이 아직 내 신체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고, 용사의 슬픈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질 생각을 않았다. 도대체 이 허무하고도 대책 없는 꿈은 나에게 뭘 전달하고 싶었을까? 내가 머지않은 미래에 느끼게 될 감정? 언젠가 있을 용사의 배신? ……동료의 소중함?
  어느 쪽이던지 영 유쾌하지 못하다. 애초에 꿈 따위에 현실을 내걸 만큼 미련하지는 않다. 예지몽이니 뭐니 하면서 좋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늘 한심하다 여겨 왔으니. 나는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시작했고,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아침부터 이불을 싸매고 가만히 앉아 있는 용사가 보였다.

 "아, 전사."
  용사는 내 얼굴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솔직히 그 꼴을 하고서는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당장 그 이불을 뺏아 춥답시고 부들부들 떠는 그를 놀려 주고 싶었기 때문에.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나아갔다. 그리고 가까워졌다.
  이불의 끄트머리 쪽으로 손을 내민 순간, 갑자기 용사의 얼굴이 꿈 속에서 봤던 그 표정과 순간 겹쳐져 보였다. 나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던 그 애처로운 얼굴. 당황스러웠다. 방금 꿈에서만 해도 그 모습은 나를 굉장히 슬프게 만들었었는데, 이 멍청한 용사는 환상도 모자라 이제는 현실에서까지 이 위험한 얼굴을 내보인다. 가슴 한 켠이 아프게 욱씬거렸다. 언젠가 이 용사도 떠날 것이라는 생각에 눈가가 따가워지고 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건 반칙이 아닌가.

 "전사, 전사."
 "아."
  그의 부름에 거의 놓을 뻔했던 정신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용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뻗었던 팔을 뒤로 뺐다.

 "갑자기 왜 울어? 어디 아픈 곳이라도?"
  용사가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 않던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하고 반박하려고 입술을 떼자마자 뺨에 느껴지는 따뜻하고도 생생한 느낌에 바로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내가 울고 있는 건가? 설마, 정말로 내가? 믿기 힘들어 검지 손가락 하나를 눈가에 가져다 대니 웬 촉촉한 것이 묻어 나왔다. 나는 그대로 넋을 잃고 말았다.

 "저기,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용사는 당황한 목소리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솔직히 조금 괘씸했다. 따지고 보면 다 당신 때문인데요, 내가 너만 안 만났으면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만,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하고 꿀꺽 삼켰다. 그래서 그 대신 다른 한마디를 남겼다.

 "꿈이 현실을 지배할 수도 있는 거군요."
 "하?"
  의미심장한 소리 하지 마, 라고 그가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묘한 말도 아닌데. 뭐, 용사는 멍청하니까 그 정도는 내가 이해해야지. 아까 이불을 끌어 당기려다가 뺐던 손을 다시 들어 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용사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러자 용사가 조그맣게 '로스.'하고 중얼거렸다.
  넌 아직 이 기분 몰라도 됩니다. 아니, 그냥 앞으로도 알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누군가를 잃고 울어야 한다는 게 당신 또는 나의 운명이라면 차라리 늦게나마 깨닫는 게 나아. 나이도 고작 10대의 중반에 서 있는 당신에게 너무 버거운 사실일테니까. 그 얼굴에 슬픔만 묻지 말아 주세요. 내가 떨어지고 있을 때 당신이 지었던 그 섬뜩한 표정, 다시는 띄우지 말아 주세요.
  바깥에 햇살이 화창하게 핀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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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28] [닌타마 란타로 2학년] 겨울의 유토피아 (미완성)

 

 

 

  지금이 겨울임을 요란스럽게 알리는 새하얀 눈안개가 온 세상을 덮고 있어 마치 미술 숙제를 하던 어린아이가 흰색 물감을 실수로 하늘에 엎어놓은 것만 같았다. 밤새도록 눈이 펑펑 내려 길바닥에 잔뜩 쌓인 눈을 설피로 꾹 밟으면 땅 위로 솟아있던 눈이 아주 부드럽게 아래로 사르르 꺼지곤 했는데, 그런 눈벌 위에서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누군가에게 발목을 붙잡히고 있는 듯해 상당히 꺼림칙했다. 게다가 설면이 거의 무릎 아래까지 올라와 있었기에 얼음장마냥 차가운 눈이 종아리를 옥죄는 그 숨막히는 느낌은 참말로 뭐라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짜증난다고 할까, 답답하다고 할까. 어쨌든 뭐니뭐니해도 제일 중요한 건 몸을 가누고 움직이는 것 그 자체가 굉장히 버겁다는 점이다. 
  과연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자신의 발이 심하게 혹사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저 멀리서 상당히 익숙한 인술학원의 교문이 사콘의 힘 빠진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는 꽝꽝 얼어 빨갛게 변한 손으로 어깨에 맨 보따리의 끈을 잡고 낑낑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사콘이 지금 매고 있는 파란색 보따리는 작법위원회가 사용하고 있는 헤드 피규어 두어 개와 크기가 거의 맞먹었다. 게다가 대체 뭐가 들었는지 아래로 축 처져 있어 금방이라도 내용물들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게 제법 무거워 보였다. 왜소한 사콘의 몸집으로 힘이 들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사콘은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과 다리를 조이는 눈 때문에 오는 길에 고생을 아주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교문 앞에 다다른 그의 표정은 거의 울 것 같았다. 얼마나 기뻤으면.
  사콘이 '인술학원' 이라고 반듯하게 써진 팻말이 걸린 교문의 문을 몇 번 두드리자 칙칙한 파란색의 사무원 닌복을 입은 낯익은 얼굴의 한 남자가 문 틈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아, 어서 와!"
  그는 커다란 짐 때문에 사콘은 교문을 통과할 때 약간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사무원 코마츠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잘 들어왔다. 코마츠다는 문을 두드린 사람이 사콘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약간 경계심을 품던 눈빛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 웃음에 답하기라도 하는 듯이 사콘도 코마츠다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학교 안에는 눈이 거의 쌓여있지 않았다. 아마도 코마츠다와 벌을 받은 닌타마 몇 명이 열심히 눈을 퍼다가 나른 덕분일 것이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인술학원을 보니 사콘은 더이상 눈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을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여태까지 계속 고생을 했으니 일단 기숙사로 돌아가자마자 눈에 잔뜩 젖은 몸을 씻고 잠이나 한 숨 잘 생각이었다.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고 6학년 이반 기숙사로 향하려 발을 떼는 사콘.

 "맞다, 사콘 군!"
  갑자기 코마츠다가 무엇인가 떠올랐다는 듯한 말투로 막 발걸음을 옮기던 사콘을 불렀다. 자신의 이름이 들린 순간 제자리에 멈칫 선 사콘이 의아스러운 얼굴로 코마츠다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세요?"
  살짝 갈라진 그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아까 교장 선생님께서 6학년들은 당장 교장실로 집합하라고 말씀하셨었는데, 아마 사콘 군도 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콘을 바라보며 멍한 목소리로 코마츠다가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콘의 표정은 짜증에 뒤덮였다. 가뜩이나 피곤해서 죽겠는데 뜬금없이 교장실이라니. 그의 입장으로서는 최악이 아닐 수 없었다. 
  불만을 토로하려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콘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고 입을 열자마자 코마츠다의 뒷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았거든."
  그 한 마디에 사콘은 바로 입을 닫았다.


 

 





 "으, 짜증나."
  전혀 예상치 못한 스케줄이 생겨버린 사콘은 교장실로 가는 길에도 잔뜩 부루퉁해진 얼굴로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안 가고 마는건데 코마츠다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까지 말했기에 왜인지 함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불만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보나마나 또 이상한 발상이 떠올랐다며 6학년들에게 일을 좀 도와달라는 내용이겠지. 그는 괜히 화풀이를 한답시고 땅에 붙어 있는 덜 쓸린 눈뭉치 발로 콱 하고 밟았다. 밟힌 눈은 부드럽게 아스러졌다.
  교문과 교장실은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한 이삼 분쯤 천천히 걸으니 저 멀리 교장실이 보였다.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교장실 앞 마당에서는 화초를 기르고 있었다. 종종 그 살인적인 추위에 그대로 내버려지는 화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인술학원의 그 누구도 한겨울에 화초를 기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콘도 딱히 신경을 쓰진 않았다.
  몇 걸음을 더 걸으니 교장실 내부가 살짝 보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몇 년 전보다 더욱 주름살이 진 듯한 백발의 교장 선생님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눈을 감고 무릎에 손을 얹은 채로 앉아 계셨다. 아마 깊은 생각에 빠지신 듯 했다.
  그 다음으로 보인 건 6학년 닌복을 입고 있는 동급생들의 등이었다. 그들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나름대로 격식을 차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콘은 별 생각 없이 천천히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애초에 다리에 힘이 쫙 풀려서 뛸 수도 없었고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교장 선생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고는.

 "카와니시 사콘! 빨리 오지 못해!"
  벼락처럼 떨어진 호통소리. 아무도 예상치 못한 고함에 사콘은 물론이고 교장 선생님 앞에 앉아 있던 다른 6학년 셋도 움찔하며 놀랐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으면 교장실 근처를 지나가던 1학년 몇 명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아닌가. 사콘은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라 짐이 무거운 건 생각도 안 하고 냅다 교장실을 향해 달렸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방으로 들어가면서도 사콘은 말로 표현 못 할 창피함과 억울함에 계속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제일 끝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사부로지가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왜 이렇게 늦었어.'라며 살짝 속삭였지만 사콘은 지금 대답을 할 상황도, 기분도 아녔기에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는 어깨에 맨 보따리를 풀지도 않은 상태로 큐사쿠 옆의 빈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께서 자신의 주먹을 입에 가져다 댄 다음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말을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너희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교장실 안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침을 꼴깍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곧 치뤄질 졸업시험에 대해 말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교장 선생님의 그 한 마디에 그들은 움찔했다. 사콘은 살짝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었고, 졸고 있었던 듯 고개를 꾸벅거리던 큐사쿠도, 멍하니 시선을 허공에 맞추고 있던 시로베도, 관심 없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검지손가락을 팔뚝 위에서 툭툭 튕겨내고 있던 사부로지도 하던 행동을 멈췄다. 그들은 뒤에 이어질 교장 선생님의 말에 집중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현재 6학년. 그 말이라 함은 곧 있을 겨울방학이 지나고 나서 마지막 졸업시험을 치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험에서 통과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예전까지의 성적이 좋았더라도 인술학원을 졸업할 수 없고, 최악의 경우는 끝까지 다 온 마당에 닌자의 길을 걷지 못 할 수도 있다. 닌자들의 세계는 끔찍하리만치 혹독하기에 아직 정서적 면에서나 실력 면에서 준비가 되지 않은 학생을 함부로 내보낼 수는 없다, 그게 바로 졸업시험의 이유였다.
  그러한 이유로, 6학년들은 지금 졸업 시험에 대해서는 상당히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진로를 한 번에 뒤엎을 수도 있는 중요한 시험이니까. 그런데 지금 교장 선생님이, 인술학원의 창시자가, 시험 출제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 그들에게 졸업 시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렇기에 당연히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결정적인 힌트라도 주려는 걸지도 모른다.

 "졸업 시험 과제를 뭘로 할 지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을 해 봤다. 왜인지 올해는 여태까지에 비해서 정하는 게 더 어렵더구나."
  교장 선생님께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따라 굉장히 굳세고도 나긋나긋한 그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졸업시험 과제는 매년 이맘떄마다 모든 선생들이 한데 모여서 회의를 한 결과로 정해지지. 절대로 나 혼자만의 의견도 아니고, 선생들 몇 명만의 생각도 아니야."
  6학년들은 모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교장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도면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움을 느낄 법한데도 교장 선생님의 얼굴에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은 지금 6학년. 마음만 먹으면 살인도 간단하게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테지."
  한 마디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의 방 안은 쥐 죽은 듯이 아주 조용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살인'과 '배신'이라는 단어가 강렬하게 들려와 그들의 마음 속에 내리꽂혔다.

 "하지만 닌자들의 세계는 너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다. 이 세계에서는 말이다, 사람 몇 번 죽여봤다고 전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군을 배신하는 법을 안다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교장 선생님이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6학년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눈동자를 아래위로 굴리며 입술을 꼭 깨물고만 있었다. 어째 이야기가 점점 심오해지는 것 같았다.

 "뭐, 여기서 더 말을 꺼내봤자 주책없는 소리겠군."
  갑자기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오묘한 웃음을 짓는 교장 선생님. 이 상황에서 그런 웃음을 왜 짓는건지 지금까지의 그들의 입장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6학년의 졸업시험은 말이다."
  드디어 본론이다. 무거워진 공기를 비롯해 방 안에서의 긴장감은 이미 최고조였다. 모두들 다 상체를 앞으로 빼고 앉아있는 것이 최대한 교장 선생님의 말을 다 귀담아 들으려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이미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 이외의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바깥에서 1학년들이 뭉친 눈을 서로에게 던지며 시끄럽게 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장실 안에서에는 모든 소리가 삭제된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반으로 자른다."
  이 말의 의미는.

  "시험 결과에 따라서 너희들 중 단 두 명만 졸업을 시키겠다는 소리다."
  폭탄 발언이었다.

 "……예?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사부로지였다. 아니, 말보다는 그냥 목에서 흘러나온 소리 같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방식이 어디에 있는가. 분명 졸업시험은 누가 더 잘하고 못하나를 따지는 게 아니라 개인의 실력이 인술학원이 요구하는 기준치에 도달하느냐, 아니냐를 재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6학년 총 네 명 중에서 두 명만 졸업을 시키겠다니. 아무리 봐도 억지였다.

 "그, 그러면 나머지 두 명은요?"
  큐사쿠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아니 모두는 지금이라도 교장 선생님께서 유쾌한 말투로 '당연히 농담이지!'라 말씀해주셨으면 하고 내심 바랐다.

 "뭐, 닌자를 포기하던지. 학교를 1년 더 다니던지."
  하지만 교장 선생님의 말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태연했다. 장난 삼아 해 본 말이라 믿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이런 게 어딨어요! 넷 중 둘은 떨어진다니, 말도 안 돼! 왜 하필이면 꼭 누군가가 떨어져야만 하는 건데요!"
 "그리고 졸업 시험은."
  참다참다 못해 결국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을 내뱉는 사부로지. 그리고 그의 말을 아주 가볍게 묵살하는 교장 선생님. 사부로지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앞니로 꽉 깨물었다.

 "아무도 모르게 치뤄질 예정이다. 너희는 결과 발표가 날 때까지 평소대로의 생활을 하면 된다."
  이 말은 6학년들을 한 번 더 벙지게 만들었다. 직접적으로 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만 하라니. 도대체 시험 과제가 무엇이기에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건지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건 여태까지 치뤄온 시험들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골치 아픈 시험 과제였다.

 "어쨌든 내 할 말은 이걸로 끝이니 다들 돌아가 보거라. 특히 사콘 군, 다녀오자마자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고."
 "아. 가,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의 갑작스런 부름에 아직 쇼크가 덜 가신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콘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충격적인 발언을 해 놓고서는 이제와서 쉬라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 와중에서도 친구들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진 사콘은 방을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면서 옆에 앉아 있던 동급생들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하나같이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입을 헤벌레 벌리고 있기도 했고, 여전히 이 상황이 혼란스러운 듯 눈을 미친듯이 깜빡이기도 했다.
  사콘은 한숨을 짧게 내뱉은 다음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는 갑자기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왔기에 씻기 전에 잠시 의무실에 들러 약을 얻어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건위원장이 의무실 덕을 본다니 조금 웃긴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보건위원도 사람이니까.
  그렇게 6학년들은 다들 교장실을 나와서 각자 자신이 가야 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까지만 해도 교장실 마당에서 시끄럽게 놀고 있던 1학년들도 어느새 기숙사로 돌아갔는지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교장 선생님을 제외한 모두가 떠난 교장실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그리고 이 날을 시작으로 6학년들 사이에서는 살벌한 무언의 눈치게임이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붓으로 시작점을 찍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늘은 계속 눈이 내리지 않았다.


 

*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날이었다. 해가 늦게 뜨는 계절이라 바깥은 아직도 깜깜했다.
  사콘은 오늘 아침따라 이상하게 눈이 더 잘 떠졌다. 아니 사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대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는 전날 낮에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피곤함을 못 이기고 바로 드러누워 곯아떨어졌었기에 밤잠이 쉽게 올 리가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졸업 시험의 내용마저 떠오르니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불면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새벽 다섯시 쯤에 겨우겨우 잠들었다가 방금 전에 다시 깬 것이다. 그런 사콘은 자신의 신세가 참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천장을 향해 소리 없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때 누군가가 이불 위에서 몸을 한 번 뒤척였다. 이불이 마찰하여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제법 멀리서 들려오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큐사쿠인 모양이었다. 처음 한 번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부터 잠깐동안은 계속 조용하더니 또다시 들리는 이불 뒤집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계속 혼자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으니 살짝 심심해졌던 사콘은 내심 큐사쿠가 깨어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으으……."
  큐사쿠가 짧게 신음했다. 사콘은 위치상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피곤에 찌든 그 목소리만 듣고도 현재 큐사쿠의 표정을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참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6년간 함께 해 온 룸메이트이기에 가능한 추측이었다.
  잠시동안 방 안에 묵직한 정적이 돌더니 얼마 안 지나서 누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대체 무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 사콘은 '베개와 이불이 동시에 눌렸다가 다시 펴지는 오묘한 느낌의 소리'라 설명하지 않을까. 어쨌든 실눈을 뜨고 큐사쿠가 누워 있던 자리를 살짝 쳐다보는 사콘. 거기서는 같은 반 친구가 졸린 얼굴을 한 채 자신의 눈을 부비고 있었다. 
  큐사쿠는 6학년 이반 학생들 중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두 번째가 사콘이고, 항상 맨 마지막에 일어나는 건 사부로지였다. 오늘은 사콘이 가장 첫 번째로 일어나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사부로지는 이불을 저 멀리 걷어차 버리고 잘도 자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기 귀찮았던 사콘은 큐사쿠가 뭘 하는지 멀리서 멍하니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큐사쿠는 팔을 위로 쭉 뻗으면서 기지개를 켠 뒤 하품을 길게 한 번 내뱉었다. 그러고는 자기 다리를 덮고 있던 두꺼운 흰 이불을 앞으로 밀어냈다. 아마도 몸을 일으키려는 모양이었다. 

 "……으음, 스테이크."
  꿈에서 스테이크라도 나온 건지 옆에서 사부로지가 이상한 잠꼬대를 해 대는 바람에 열심히 자는 척을 하던 사콘은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나중에 그가 일어나면 혹시 스테이크 꿈을 꿨는지 한 번 물어봐야겠다고 사콘이 내심 생각했다.
  그 와중에 큐사쿠는 어느새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 위에 서 있었다. 큐사쿠는 또래에 비해서 키가 좀 큰 편이었는데, 아래에서 올려다 보니 안 그래도 길쭉한 키가 더 커 보였다. 그런 큐사쿠보다 몇 센치정도 더 작은 사콘은 그가 조금, 아니 많이 부러웠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키가 작은 닌자보다는 키 큰 쪽이 훨씬 더 멋있어 보일 테니까. 뭐, 활동을 하기에는 작은 쪽이 더 수월할 지도 모르지만.
  큐사쿠는 서서도 기지개를 한 번 쫙 폈다. 아무래도 자다가 일어났느니 몸이 제법 뻐근했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아침 체조를 하려는지, 아니면 얼굴을 씻으러 가는 건지는 몰라도 방문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큐사쿠. 큐사쿠의 이부자리는 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걸어서 가는 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그는 나무 미닫이문 앞에 서서 멍한 얼굴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미닫이문을 왼쪽으로 쭉 밀었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야외의 찬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방 안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그리고, 번뜩 하는 것이.

 "으, 으아아악!"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그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키는 사콘. 자는 척이고 뭐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왜 그래, 큐사쿠!"
  사콘은 방 문 앞에 딱딱하게 굳은 채로 우뚝 서 있는 큐사쿠를 소리쳐 불렀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있던 그가 갑자기 왜 비명을 지른단 말인가. 큐사쿠는 마치 로보트처럼 아주 뻣뻣하고 느린 속도로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콘에게 꽂힌 그의 눈동자는 당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 방문 앞에."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 도대체 방문 앞에 뭐가 있다는 건지 알 턱이 없던 사콘은 거의 덮은 둥 마는 둥 했던 이불을 옆으로 쓱 밀어낸 다음 오른쪽 다리부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일어선 상태가 되자 그제서야 사콘의 눈에도 큐사쿠가 깜짝 놀랐던 원인이 보였다. 뭐라고나 해야 하나, 충격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공포스럽다고 할까. 오래 전부터 깨어 있었기에 또랑또랑했던 그의 눈망울이 그 문제의 바깥을 향하자 아무런 소리 없이 두 배로 더 커졌다. 그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 지 몰라 그저 어버버하고만 있었다.
  6학년 이반 기숙사 앞 마루에 날이 잔뜩 선 표창 여러 개가 불규칙한 배열로 꽂혀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저게!"
  사콘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아까부터 큐사쿠가 서 있던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혹시나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본 건 아닌가 하여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는데, 부질없는 짓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살을 찔리는 느낌이 올 정도로 날카로운 여러 개의 표창이 그들의 기숙사 앞에 잔뜩 꽂혀져 있었다. 큐사쿠와 사콘은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이거, 뭘까? 장난?"
  큐사쿠가 긴장되는 목소리로 살짝 속삭였다. 그 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사콘. 이걸 장난으로 보기에는 너무 도가 지나쳤다.

 "혹시 너 요며칠간 다른 성 닌자랑 시비 붙은 적 있냐?"
 "그럴 리가."
  이번에는 큐사쿠가 머리를 저었다. 사실 사콘은 반 정도 진심이었다. 큐사쿠라면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콘은 마루에 꽂혀진 표창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기에 햇빛은 쥐꼬리만큼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맨질맨질한 금속 표면이 계속 번뜩이고 있었다. 뭐 별 달리 취할만한 행동이 없었던 사콘은 계속 표창들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저걸 뽑아야 하나, 가만히 놔둬야 하나. 이런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어쩌면 인술학원을 노리고 있는 적군의 도발일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교무실에 찾아가서 노무라 선생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6학년이나 돼서 이런 것에 겁먹다니 바보구나.'라는 빈정거림을 들을 지도 모르지만 불안한 건 불안한 거다. 사콘은 여전히 밖을 바라보며 멀뚱히 서 있는 큐사쿠와 벽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표창이 꽂혀 있지 않은 바닥 쪽으로 발을 내밀었다. 약간 위험한 행동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순간 사콘의 머릿속을 푹 찌르고 들어오는 기분 나쁜 한 생각.
 
 '너희들은 지금 6학년. 마음만 먹으면 살인도 간단하게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테지.'
  사콘은 자신의 등골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이 아주 선명하게 느껴졌다. 떠오른 것은 어제 교장 선생님께서 6학년들에게 했던 말이었다.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 누군가를 배신. 배신하는 것쯤이야. 그 세 개의 어절이 계속 그의 사고회로를 맴돌았다.
  자고로 닌자란 어제까지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는 그런 잔혹한 세계에 속한 자들이다. 그런 것 쯤이야 어렸을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왔기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세계에 속해 있는 닌자였다. 설마, 설마. 정말 만약에 그 아이라면…….

 "사콘!"
 큐사쿠가 옆에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그는 표창에 발바닥을 찔릴 뻔했다. 헛, 하는 짧은 소리를 내며 뻗은 다리를 재빨리 뒤로 빼는 사콘. 갑작스런 행동에 그는 잠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다행히 옆에  있던 벽에 손을 짚음으로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런 사콘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큐사쿠.
  사콘은 고개를 아래로 떨군 상태로 침을 꿀꺽 삼켰다.

 "있잖아, 큐사쿠."
  목소리가 아주 작았기에 바로 옆에서 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그 소리는 큐사쿠에게 아주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혹시 어제 시로베 본 적 있어?"
  사콘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큐사쿠는 처음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한 삼 초 정도 지나고나서 점점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 무언가 말로 형용하기 상당히 어려운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사콘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눈치챈 것 같았다.

 "설마."
 "그 아이…… 일지도 몰라."
  또다시 충격을 받은 듯한 큐사쿠의 목소리를 이어 사콘이 말 끝을 살짝 흐리며 말했다.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설마 시로베가 이런 짓을 했을 거라니, 바보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새벽에 6학년 이반 기숙사 앞에다가 표창을 꽂고 있는 시로베의 웃는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들은 시로베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었는데, 이번 졸업 시험으로 인해 순수고 뭐고 다 잃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애초에 사람을 가볍게 베어 버리는 닌자에게 '순수하다'라는 감정을 느낀 그들이 바보였을지도 모른다. 큐사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빌어먹을 졸업시험 때문에?"
  큐사쿠가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콘도 여전히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며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활짝 열린 미닫이문 사이로 얼음장같은 겨울 바람이 슝슝 드나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문을 닫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 앞에 박혀 있는 표창을 뽑을 생각은 더더욱 않았고 말이다. 친구에 대한 배신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감정만이 현재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무거운 기류를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

 

 

 

 

 

  그 일이 있은 지로부터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떨 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6학년들 사이에는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듯한 미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의 상태를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이 둘, 차마 친구에게 무기를 겨누지 못하고 여전히 평소와 같은 생활을 보내려 노력하는 이 둘이 있었다. 전자는 시로베와 큐사쿠였고 후자는 사콘과 사부로지였다. 일주일 전 아침에 그 작은 소동이 일어난 이후로부터 큐사쿠도 점점 사납게 변해갔다. 언제는 한 번 의무실에 가져다 놓을 붕대들을 잔뜩 안고 가던 사콘이 그에게 떨어진 붕대 하나를 좀 주워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큐사쿠가 지었던 표정을 사콘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실없게 웃으며 부탁하던 사콘을 마치 하찮은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던 그. 6년간 함께 지내오면서 친구에게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는 큐사쿠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사콘은 그 표정이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부로지도 큐사쿠가 이상해져 가는 걸 대충 알아챈 모양인지 일부러 그를 기피하는 듯 했다. 그 덕분에 최근 6학년 이반의 교실 분위기는 아주 볼만했다. 게다가 가면 갈수록 기습의 정도는 더욱더 심해지고 있었다. 처음 하루이틀간은 기숙사 문 앞에 표창 몇 개가 꽂혀 있는 수준에서 그쳤었는데 이제 그것만으로는 성이 안 찼었는지 점점 더 위험한 무기들이 날아오곤 했다. 대표적으로는 쿠나이, 조금 더 위험하게는 줄표창이나 효도. 오죽하면 며칠 전에 사부로지가 목욕을 끝내고 욕탕에서 나오려던 참에 갑자기 그를 향해서 웬 표창이 날아온 적도 있었다. 아주 몇 일 더 있다가는 보록화시까지 날아올 기세였다. 공격 이외에는 아무런 소통이 없던 그들은 현재 매우 살벌했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상황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한 사람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사콘이었다. 그는 일주일 전 사건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부터 계속 자신을 공격해오는 동급생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절망스러웠다. 생각을 해 보자. 인술학원에 입학하고 나서 처음으로 사귀었던, 것도 6년 가까이 알고 지냈던 친구들이. 언제는 '만약에 우리가 졸업하고 나서 적으로 만난다면 과연 싸울 수 있을까?'같은 낯간지러운 대화를 나눴던 친구들이 이제 자신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다. 해맑은 목소리로 '난 못 싸워!'라고 대답했던 시로베도, '나도 너희랑은 좀.'하며 멋쩍게 뒷통수를 긁적였던 큐사쿠도 이제는 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눈빛에는 오직 살의, 손 위로 든 건 무기, 비열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사실 사콘도 친구들에게 공격을 가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지난번에 누군가가 의무실 앞 복도를 밟으면 천장에서 쿠나이 여러 개가 떨어지는 장치를 설치해 놓았을 때는 그도 머리 끝까지 분노가 솟아올라 범인이 누구던지 잡히면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단순히 자신이 공격받고 있다는 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 전혀 상관 없는 보건위원이나 의무실을 방문한 환자가 다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때에도 감히 무기를 집어들지 못했다. 명색이 보건위원장인데 '남을 죽이겠다'는 섬뜩한 생각을 과연 품고 있어도 되는 걸까, 하는 자괴감이 머릿속을 잔뜩 헤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콘이 남을 쉽게 공격할만큼 잔혹한 성격도 아니었고 말이다. 결국 그는 변해가는 친구들 사이에 끼여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기만 했다. 

  사콘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하고 해결책을 얻었으면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이 일을 털어놓아야 할 지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볼까하는 고민도 한 번 했었지만 그랬다가는 '나약한 학생'으로 낙인이 찍힐 것 같았기에 빠르게 포기했다. 그렇다고 후배 한 명을 붙잡고 징징거리기에는 아무래도 선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듯한 답이 나오질 않았기에 역시 포기하는 게 나을까 싶었던 그는 가만히 한숨만 내뱉었다.
  그 때 무언가의 생각이 사콘의 머릿속을 팍, 하고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보니 동급생 중에서도 자신과 같이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는 아이가 한 명 있었다. 같은 반인 사부로지. 사부로지라면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해 줄 것만 같았다. 갑자기 엄습하는 설렘과 긴장감에 사콘은 가슴에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정리하던 약재를 내팽개치고 당장 의무실을 뛰쳐나왔다. 사부로지를 찾기 위해서.



 "사부로지 있어?"
  이 시간이면 6학년들은 대개 위원회 활동으로 바쁘기에 화약위원장인 사부로지는 십중팔구 화약고에 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단숨에 화약고까지 달려온 사콘은 살짝 열린 화약고 문의 틈새로 얼굴을 들이밀며 사부로지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러자 깜깜한 화약고 안에서는 사부로지의 말대답 대신 누군가가 발을 뚜벅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왠지 모를 떨림에 침을 꼴깍 삼키는 사콘. 그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사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까만 그림자에 드리워져 있던 닌복이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만나자마자 조금 칙칙한 6학년의 초록색을 찾았다. 얼굴의 음영도 차차 걷혔다. 사부로지는 웬 커다란 단지 하나를 품에 안은채로 의아스런 얼굴로 사콘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와."
  얼굴만 살짝 내밀고 있던 사콘을 잠시 몇 초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깜빡이며 짧게 말하는 사부로지. 사실 바깥에 찬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추웠던 사콘은 그의 호의가 기쁜 듯 여닫이문의 손잡이를 잡고 자신의 앞으로 힘껏 끌어 당겼다. 바깥이 품고 있던 눈부신 빛이 캄캄한 화약고 속으로 잔뜩 쏟아져 들어갔다.

 "무슨 일이야?"
  사콘이 실내로 들어오고 다시 문이 굳게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사부로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사부로지가 들고 있던 큰 단지가 신기해 보였는지 거기에 잠깐 정신이 팔려 있던 사콘은 그 물음에 그제서야 자신이 여길 온 이유가 떠오른 듯 '아.'하는 짧은 소리를 냈다. 사콘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게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이더니 고개를 들어 자신보다 키가 큰 친구를 살짝 올려다봤다.

 "그…… 너랑 하고픈 말이 있어."
 
 

 






  그들은 화약고 벽에 기대선 채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는 의외로 빠르고 순탄하게 이어졌다. 사콘은 우선 사부로지에게 요즘 우리 6학년들의 분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부로지는 그 질문을 대충 예상하기라도 한 듯한 눈으로 몇 초간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자신도 몇 번 공격을 당한 입장으로서 썩 좋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역시나 그렇구나.'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콘. 그 뒤로는 대부분이 푸념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며칠 전에는 내가 이러이러하게 당할 뻔하였고, 이러고 있는데 갑자기 수리검이 날아왔다. 라는 등의 내용들 말이다. 하지만 의외롭게도 그런 대화에 진전 없는 넋두리에도 사부로지는 사콘의 말을 귀담아서 잘 들어주고 있었다.
  긴 한탄 혹은 서론이 끝나자마자 사콘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있잖아, 솔직히 말해도 돼?"
  사콘이 사부로지를 살짝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눈을 살며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부로지. 주먹을 꽉 쥔 사콘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망울을 살짝 빛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무서워. 친구들은 계속 나를 공격해 오는데 정작 난 나약하게 아무것도 못 하고 당황스러워하고만 있는 것도 그렇고, 까딱했다간 내가 졸업 시험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그래."
  말을 이어나가는 사콘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제일 두려운 게 뭐냐면, 이대로 더 있다가는 정말로 저 아이들이 날 죽일 것만 같다는 거야."
  정말로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여태까지 고작 이 한 마디를 남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그는 홀로 끊임없이 마음앓이를 해 왔었다. 그건 참말로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화약고 안에 정적이 가득 찼다. 말을 끝낸 사콘은 조용히 사부로지의 반응을 기다렸다. 사부로지는 여전히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것이 마치 무슨 생각에 깊이 빠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사부로지의 얼굴에 아주 잠깐동안 엷은 웃음이 번졌다.

 "나도 그래."
  그 말에 사콘의 눈동자가 두 배 가까이 커졌다.

 "저, 정말?"
 "당연하지. 솔직히 이 상황에서는 안 무서운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사부로지가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 순간 사콘은 자신의 머릿속에 온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한꺼번에 흘러 들어오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도박판에서 승리를 한 오묘한 느낌이라고나 해야 하나. 어쨌든 상당히 기쁜 건 확실했다.

 "있잖아. 그러면 사부로지."
  사콘이 그답지 않게 약간 머뭇거리는 말투로 사부로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사부로지는 눈을 한 번 크게 떠 보임으로 그의 말대답을 대신했다.

 "우리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듣기에 약간 오글거리는 대사일 수도 있지만, 그 말은 사콘이 제 나름대로 아주 진지하게 뱉은 것이었다. 덕분에 사부로지는 그만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혀를 깨물면서까지 어찌어찌 잘 참아냈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한다.

 "뭐 당연한 걸 그리 진지하게 묻고 있어?"
  그들의 심정 고백은 칠흑의 화약고에서 나눠지는 대화 치고는 제법 훈훈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공간 내에선 정말 앞으로는 행복한 일만 잔뜩 일어날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있잖아, 우리 이 대화가 6년간 나눴던 대화 중에서 가장 진지한 대화일지도 몰라."
 "뭐?"
  사부로지가 팔꿈치로 사콘을 쿡쿡 찌르며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사콘은 평소 같았으면 미간을 찌푸리는 등 온갖 싫은 티를 냈었겠지만 어째 지금은 그 장난마저도 친근한 것이 매우 반갑게 느껴졌다. 그들은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평온할 것만 같았다. 화약고 속의 따스한 온기가 그러하고, 그들이 나눈 이야기 내용이 그러하였으며, 그들이 흘린 웃음소리가 그러했다.
  
 "아, 맞다. 나 약초 정리하다가 왔었지."
  투명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사콘이 등을 벽에서 떼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아까 그는 약재를 종류별로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급한 마음에 그런 건 생각도 안 하고 화약고에 달려 왔었다. 그 사실을 니이노 선생님께 들킨다면 한 소리 들을 것 같았다.

 "가 볼게,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사부로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리며 사콘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달리 엷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 미소에 답이라도 하듯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사부로지, 허둥지둥 화약고를 나서는 사콘. 사부로지는 여전히 벽에 기대 팔짱을 낀 채 그런 사콘의 뒤를 눈으로만 좇고 있었다. 잠시 밀렸던 여닫이문이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둔탁하게 닫히자 화약고 속에는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암흑 속을 파고드는 것들은 무거운 발소리, 발소리, 발소리, 그리고…….





  어느새 어둑어둑한 저녁이 찾아왔다. 아니, 겨울이라 해가 일찍 져서 마치 지금이 저녁인 것처럼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마당에서 닌자놀이를 하며 뛰놀던 1학년들의 소리도 어느새 허공에서 사그라져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수놓아진 검푸른 하늘이 참말로 겨울의 저녁다웠다.
  사라진 태양에 절로 어두컴컴해진 의무실 안에는 주황의 촛불 두 개가 사콘의 양 옆에서 가냘프게 일렁이고 있었다. 불청객처럼 찾아온 깜깜함에 약초들의 색이 구분이 잘 안 갔었기에, 행여나 약재를 기호별로 잘못 정리하기라도 하면 나중에 어떤 큰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란타로랑 후시키조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탁한 초록색을 띄는 수상한 약초 한 줄기를 눈 앞에다 대고 자세히 들여다보며 사콘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란타로와 후시키조는 오늘 낮에 5학년 단체 실습 훈련이 있다는 이유로 의무실에는 저녁 쯤에 돌아오겠다고 했었는데, 곧 시간이 흘러흘러 누군가가 수채화 물감을 하늘에 한 방울 뚝 떨어뜨린 것처럼 상천은 점점 검게 짙어져 가는데도 어째 그들은 코빼기도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오는 길에 함정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생각이긴 했다.
  사콘은 손에 들고 있던 약초를 나무 껍질로 엮인 바구니 안에 살짝 떨어뜨려 놓은 뒤 그 바구니를 옆으로 살짝 밀어 놓았다. 그는 아까전에 화약고에 다녀온 이후로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약초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작업을 행하고 있었기에 언제부턴가 살짝 붉은 빛이 감돌던 눈은 마치 누군가가 속에 뜨거운 기름물이라도 튀겨 넣은 듯이 쓰라렸고, 이미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어깨는 조금씩 욱신거렸다. 그 빌어먹을 아픔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통나무처럼 무거운 팔을 천천히 들어올려 반대편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사콘. 그러자 시원하면서도 아찔한 통증이 온 몸을 타고 느껴졌다. '얼른 나머지 아이들이 와야 조금이라도 일을 시켜먹을 텐데.'하는 생각만 뇌리의 내벽을 강하게 치며 나온다. 사콘은 방금 꾹 눌러 감았던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살짝 뜨인 눈 너머로 흐릿하게 양촛불이 일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상당히 불규칙적인 움직임으로 울렁대는 불빛을 받치고 서 있는 촛대를 바라보고 있으니 참말로 하얬던 것이 꼭 흰 눈을 뭉쳐 놓은 것만 같았다. 흰 눈, 하얀 눈, 순백의 눈……

 "아!"
  사콘은 짧은 순간동안 느껴진 살기어린 이질적인 느낌을 의심해야 했다. 닥쳐진 사실을 인지한 건 바로 그 다음이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살짝 열린 의무실 문틈을 비집고 매우 재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그의 무덤덤하게 양초에 꽂아 놓았던 시선도, 살짝 비스듬히 기울어진 고개도 갑자기 딱딱한 돌이 된 것 마냥 잔뜩 경직되었다. 그 와중에 뺨이 쓰라렸다. 생기가 다 꺼져버려 아픔에 무감각해진 신체 중에서도 유일하게 뺨만 살아남아 그 통증을 몸 속 신경세포 하나하나에 갖다 바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충격에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이 굳은 경직을 깨고 부르르 떨렸다.

 "또, 너희야?"
  일자로 죽 그인 상처에서 붉은색 피가 가로로 긴 모양으로 흘러 내렸다. 이제는 혀마저 굳어가는지 '야?'라는 하나의 음절이 끝나고도 그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사콘은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봐야만 할 상황에 놓인 아이처럼 아주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시야에 마른 흙색에 가까운 벽지가 들어오고, 곧 그 벽 위에 깔린 탁한 회색 그림자가 들어오더니, 원래와 같으면 아무것도 없어야 정상일 평면 위에 날이 잔뜩 서 있는 웬 사방 수리검 하나가 꽂혀 있는 장면이 들어왔다. 표면이 어찌나 번뜩이는지 양촛불에 반사된 빛이 안구 속을 파고 들어와 눈이 부셨다. 한쪽 날에는 엷게 붉은 자국이 나 있었다. 자세히 보나마나 피였다. 자신의 볼을 베고 지나간 수리검. 그 수리검을 보고 있으니 언제까지 이 야비한 공격들을 참아야 하나 싶어 굉장히 껄끄러웠다. 사콘은 오만상을 지으며 시로베 혹은 큐사쿠가 던졌음으로 추정되는 그 수리검을 집기 위해 팔을 들었다. 끓어 오르는 묘한 감정에 이걸 뽑아서 다시 바깥을 향해 던져 버릴까 싶었지만, 그는 명색이 보건위원장인데다가 잘못 던졌다가는 그냥 지나가고 있을 뿐인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다칠 수도 있었기에 그냥 그 생각은 접기로 했다. 
  그는 손가락 세 개를 수리검 표면에 가져다 댔다. 수리검이 품고 있던 찬 기운이 손가락 끝을 타고 그대로 어깨까지 쭉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 살기 어린 냉랭함에 갑자기 고향 모를 불안감이 마치 밀물 밀려오듯 사콘을 덮쳤다. 웬 쥐새끼가 뱃속을 멋대로 돌아 다니고 있는 것 마냥 속이 잔뜩 울렁거렸다. 혹시 이 날에 독이 발라져 있던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과 더불어 지금 볼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피가 금방이라도 닌복 위로 떨어질 것 같은 쓸데없는 긴장감. 그런 자잘구레한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더욱더 심리적으로 파고들어 그를 끊임없이 압박해 왔다. 그것은.

 "이거."
  큐사쿠와 시로베가 주로 사용하던 그 수리검이 아니었다. 그의 또다른 룸메이트, 늘 잠을 자기 전에 머리를 맞대며 내일은 어떤 훈련을 할까 함께 행복한 고민을 했던, 가끔씩 정말 이 녀석의 머릿속은 장난으로만 가득 차 있는건가 의심이 들기도 했던, 아까전에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며 간만에 서로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던, 사부로지의 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던 그 사방 수리검은.

 "거짓말."
  짧은 한 단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의 몸이 상당히 떨리고 있다는 것이 목소리를 통해 확연히 느껴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 말도 안 되게 현실로 다가왔다. 어째서일까, 양쪽 관자놀이 부근이 욱씬거리면서 아팠다. 그 지끈거림은 이마를 타고 뒷통수로 넘어갔다. '나 설마 속은 건가?', '아냐, 다른 애가 사부로지의 수리검을 훔쳤을 수도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하는 생각들이 어느새 미간까지 넘어온 통증을 가속시켰다. 덜덜 떨리는 손바닥을 이맛전에 짚으니 예상대로 따끈한 온도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한순간 굉장히 복잡해진 머릿속에 방금까지만 해도 전기 충격이 가해지듯 따갑던 상처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온몸의 에너지와 통증이 오직 이마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은 오묘한 느낌이었다. 배신, 비애, 분노, 혼란. 그 통증은 어디서부터 달려온 녀석일까.
  그때 의무실의 미닫이문이 불량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사콘 선배?"
  굉장히 익숙한 부름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깥에서 바람 우는 소리만 미미하게 들려오던 의무실 안은 5학년 하반의 보건위원 란타로의 물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 반갑고도 원망스러운 목소리에 사콘은 미닫이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콘은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왜 이제야 온 거야!'라며 끝도 없이 계속 따지고팠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사콘에게는 그런 말을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여전히 이마를 짚은 채 기운 빠진 멍한 눈빛으로 옆구리에 약초 바구니를 끼고 서 있는 란타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여태까지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란타로에게 딱히 크게 화가 난 건 아니었지만 왜인지 치가 부르르 떨렸다. 그 와중에도 란타로는 쓰고 있는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사콘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을 뿐, 문 앞에 우뚝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해? 안 들어오고."
  그 '뭐 해?'뒤에는 '추워 죽겠는데 빨리 문이나 닫아라!'라는 짧은 문장이 생략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콘의 목소리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평소같잖은 개미만한 음량과 고르지 못한 호흡이 그 증거였다. 서로를 맞대고 있는 손과 이마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단순히 그의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아."
  짧은 시간이나마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걸까. 짜증이 살짝 섞인 보건위원장의 목소리에 마치 둥그런 비눗방울이 톡 터지듯 정신을 번뜩 되찾는 란타로. 그는 입안엣소리로 '실례하겠습니다.'라 작게 웅얼거리며 누군가에게 쫓기는 양 잽싸게 의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바깥 바람이 차기는 찼던 모양이다. 란타로의 주근깨가 콕콕 박힌 뺨은 그 겨울 칼바람에 잔뜩 빨개져서 사랑 고백을 받아 잔뜩 수줍어져 있는 풋풋한 소년을 연상시켰다. 

 "추운데 훈련이라, 5학년들도 참 고생이네. 수고 많았어."
  사콘은 썩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추위에 그대로 노출된 채로 쿠나이를 놀리고 있었을 란타로가 조금은 안쓰러웠기에 격려 담긴 상냥한 한마디를 남기고 나서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 내리며 이마에서 손을 뗐다. 들어 올렸던 왼손에는 불구덩이같던 이마의 온기가 아스라이 남아 있었다. 

 "네."
  빙그레 웃으며 답하는 란타로. 그는 미소만은 참말로 한결같았다. 1학년 때와는 달리 지금은 키도 쑥 크고, 눈매도 제법 날카로워졌으며 목소리도 소년답게 변한 그지만 어째서인지 맑게 웃음을 지을 때만큼은 혹시 란타로가 아직도 1학년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곤 했다. 그만큼 때묻지 않았다고나 할까, 순수하다고 할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때면 사콘은 늘 '나한테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하며 또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다. 마침 지금도 그 세계에 빠지려던 참이었다.

 "저, 사콘 선배."
  푸른 약초 더미가 한가득 든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 놓으며 란타로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살짝 풀려 있던 눈이 확 뜨임과 동시에 '어.'하는 짧은 외마디소리를 내뱉는 사콘. 보건위원장이라는 사람이 대체 정신을 어디다가 내놓고 사는 건지. 보건위원들은 다 이런 걸까. 사콘을 부른 채 살짝 머리를 숙인 란타로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시선을 바구니에서 떼지 않았다.

 "혹시 이케다 선배랑 무슨 일 있으신가요?"
  흠칫, 당황으로 가득찬 빛이 사콘의 표정을 폭풍처럼 쓸어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복잡한 생각이 교차했다. '갑자기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설마. 정말로 사부로지였나.', '무슨 대답을 해야……'사콘은 쓸데없이 늘 이런 면에서만 우유부단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도 그 나름대로 문제였지만, 거짓이라 굳게 믿고 싶었던 일이 사실로 다가올까봐 굳게 다물어진 입술 안에서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는 혀만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는 현재 '응. 왜?'라는 솔직한 대답과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같은 거짓 투성이의 대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별 의미가 없었다.

 "사실 오면서 봤어요. 이케다 선배가 수리검을 던지고 도망치는 것까지, 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묵직한 바위 하나가 사콘의 뒷통수를 퍽 치고 사라지기라도 한 듯했다. 짜릿하고도 소름 끼치는 전율이 그의 등줄기에서부터 시작되어 곧 온 몸 구석구석으로 다 퍼져 나갔다. 봤다고? 무엇을? 사부로지가 수리검을 의무실 안에 던진 것을! 아니, 사부로지가 아녔을 수도 있잖아? 란타로가 잘못 봤을 확률은?

 "처음에는 제 눈을 의심했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케다 선배더라구요."
  없는 것 같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란타로의 말에 사콘은 아무런 죄도 없는 아랫입술만 질근질근 씹었다. 입술의 통증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떨림을 무마하려는 것이다.

 "조금 외람된 말씀이긴 하지만…… 요즘 6학년 선배들 많이 이상해요. 뭐라고나 할까, 예전 같지가 않아요. 눈에는 늘 살기가 가득차 있어서 무어라 말을 걸기도 어렵고."
  여전히 아래를 향해 있는 머리통 밑에서부터 들리는 목소리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독 묻은 비수로 바뀌어 무방비한 사콘의 가슴 속을 쓰라리게 파고 들었다. 따가운 그의 목 속에서는 비수와 함께 찾아온 뜨거운 감정 같은 것이 잔뜩 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콘은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실은 목보다 눈이 더 뜨거웠기 때문일까. 의무실 바깥에서 바람이 휭, 하는 효과음과 함께 크게 불었다. 그 차가움이 의무실 안에 직접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소리만 들어도 추운 것이 팔뚝과 허벅지에서 닭살이 절로 돋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사콘의 아랫입술은 점점 더 아찔하게 붉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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