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120] [아야타카] 그 함정 속은 편안합니까?

 

 

 

 한적한 오후였다. 해가 하늘 위에서 느릿느릿 기울어져 갈 때 즈음 닌술학원의 모든 수업이 끝나고, 전 학년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한가하고도 평온한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학교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1학년 아이들이 교정 곳곳을 쑤시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그들은 술래잡기를 하는 모양인지 도망치는 그 모습이 도둑고양이 같은 게 나름 귀여웠다. 그런 1학년들과 마찬가지로 4학년인 아야베 키하치로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닌타마들 중의 일부였고, 그는 수업이 마침과 동시에 바깥으로 어김없이 뛰어나가 열심히 닌술학원 곳곳에 함정을 파기 시작했다.

 "함정이 134호, 함정이 135호."

 온 몸이 먼지와 흙으로 찌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정 파는게 마냥 즐거운 모양인지 아야베는 자신이 만들어 낸 구멍에 번호까지 붙여가며 그가 애용하는 후미코(밟아가면서 파는 삽)으로 파낸 구멍의 주변을 정신없이 널부러져들 있는 진흙들을 한 곳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흙들은 아야베 본인이 말하길 나름대로 '이 곳에 함정이 있습니다' 라는 암묵의 표시라고 한다. 이런 것이라도 없으면 닌술학원의 학생들은 매일매일 함정에 빠짐으로 살짝 긁혀 상처가 나는 것에서부터 팔다리가 부러진다던지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등 보건실을 찾는 사람이 수많아질 것이고, 그럼으로 인해 아야베 자신에게 언제 구멍파기 금지령이 내려질 지도 모르니 미리 본인한테 돌이올 불이익을 막아놓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은 것이다.

 "아아, 이쪽은 끝."

 아야베 키하치로는 자신이 깊게도 파 놓은 함정 135호에서 오랜 기간의 함정파기로 인해 익힌 요령으로 가볍게 탈출하고, 흙과 먼지에 더럽혀진 자신의 얼굴과 교복을 손으로 쓸어내리듯이 털었다. 그리고 본인이 파 놓은 함정들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것들을 보고 있는 아야베의 표정은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마지막으로 판 함정 135호를 힐끗 흘겨보고 아야베 키하치로는 자신이 파 놓은 자칭 예술 작품들을 뒤로하고 다른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이래뵈도 양심(?)은 있는 학생이었기에, 한 장소에만 너무 함정을 많이 파대면 지나갈 길이 아예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귀여운 1학년들이 교정을 쏘다니고 있지 않은가.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애지중지하는 삽을 어깨에 걸치고 그 곳을 떠났다. 아야베는 어느 곳에 함정을 팔 지 이리저리 살피며 걸어가면서 왜인지 자신이 누구랑 약속을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기억이 가물가물했기에 별로 신경쓰진 않았다.




 사이토 타카마루는 자신의 얕은 닌술 지식을 조금이라도 동급생 수준까지로 따라잡기 위하여 방에서 혼자 [닌타마의 친구] 라는 제목의 책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유심히 읽고 있었다. 타카마루의 나이는 15세로 현 6학년들의 나이지만 중간에 편입되었기에 학년은 4학년, 닌술 지식이나 경험은 1학년과 맞먹거나 그 이하였다. 타카마루는 그런 자신의 학문 수준을 조금이라도 더 향상시키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에 힘썼다. 하지만, 웬만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신과 잘 맞지 않는데다 흥미도 제로인 책을 눈 앞에 두고 그 책의 내용을 억지로 머리에 쑤셔넣으려 하면 어찌하던 졸리기 일쑤이다. 그도 그런것이 지금 타카마루가 딱 그 상황이었다. 안그래도 방금까지 수업을 듣고 막 방에 들어온 참이라 피곤함을 이겨내기 힘든데 지루한 독서를 더 하자니 그건 그냥 '잠을 자거라!' 하는 것과 별 다를게 없었다. 그렇게 졸음과 분투를 치르고 있던 타카마루는 자신과 동급생인 아야베 키하치로가 한 말이 떠올랐다.

 

 「타카마루 형, 나중에 시간 남으시면 제 머리 좀 손질하러 와 주실래요?」

 아야베답지 않은 부탁이라는 생각이 들었긴 했지만 타카마루는 약속이 생각난 겸 미칠듯이 밀려오는 잠도 깨고 학문에 찌들어 있던 이 손으로 오랜만에 실력 발휘도 좀 할 생각에 아야베와 타키야샤마루가 살고 있는 방 쪽으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피곤해서 물 먹은 스펀지 마냥 무거운 몸을 일으키면서 '에고고' 하는 작은 신음소리를 냈고, 타카마루 특유의 고양이 입 모양으로 제법 귀여운 풍의 하품을 하며 미닫이문 구조로 되어 있는 방 문을 부드럽게 열고 건물의 평상 아래로 발을 내딛었다.

 "으아악!"

 이상하게도 발을 바닥에 디뎠음에도 불구하고 발에는 '어딘가에 올라갔다' 라는 감각이 느껴지지 못했다. 슬프지만 타카마루가 발을 딛은 곳은 바닥이 아니었다. 평상의 아래쪽엔 바닥이 없었고 출처 모를 크디큰 구멍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애석하게도 피로에 눈이 멀어서인지 그걸 차마 확인하지 못한 타카마루는 바닥이라고 굳게 믿은 함정 속에 발을 내민 것이었고, 그대로 그는 깊디긴 함정에 재수 없게 빠져 버린 것이었다. 그만 얼이 빠져 버린 타카마루가 혼미해져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양 손으로 자신의 뺨때기를 두 세대 때리고, 어둠 속에서 유일한 빛이 비춰지는 하늘 쪽을 바라봤을 땐 이미 그는 자신의 몸의 약 서너배쯤 되는 구덩이 속에 벙진 표정으로 앉아 있는 상황이었을 뿐이다. 이 함정은 분명히 타카마루가 지금 구멍에 빠져 있는 근본적인 원인인 4학년 이반의 아야베 키하치로가 팠다고 그는 확신했다. 분명 아야베를 만나러 방을 나온 것인데 아야베가 판 함정에 빠져 버린 꼴이라 생각하니 타카마루는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헛웃음만 나왔다. 다행히도 바닥이 생각보다 딱딱하지 않은 진흙이라 큰 부상은 없었지만 떨어질 때 엉덩방아를 찧었기에 그 쪽이 슬슬 아파왔다.

 "아, 어떡하지."

 타카마루는 그 특유의 유순한 목소리로 푸르른 하늘빛이 비춰오는 위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떨군 후 이대로 누가 올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면 크게 소리를 질러서 아무나 불러볼까? 그가 이런저런 고민을 할 때였다.

 "아, 타카마루 형."

 어떠한 소리가 타카마루의 귀를 건드렸다. 그가 아까까지 계속 응시하고 있던 하늘로 다시 시선을 돌리자마자 타카마루에게 비춰지고 있던 유일한 빛이 가려지고, 빛이 사라진 그 위치 쯤에서 이 함정을 만든 주인공으로 예상되는 아야베 키하치로의 목소리가 들려 오더니 곧바로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삽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를 발견하고 나서 그제야 타카마루는 구세주를 만난 양 표정이 활짝 펴지고 그 어떤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는데, 그런 타카마루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야베는 눈을 몇 번 끔뻑이더니 갑자기 평소의 포커페이스가 아닌 이유 불문의 미소를 옅게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살짝 음침해 보이기까지 했다.

 "키하치로 군! 나 좀 여기서 꺼내 줄래?"

 타카마루가 함정 속에서 있는 힘껏 소리질렀다. 그러나 아야베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여전히 삽을 어깨에 올려놓은 채 계속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타카마루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키하치로 군……?"

 타카마루는 그런 아야베가 이상하다는 듯 손까지 열심히 흔들어 보이며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소년을 열심히 불렀다. 위에서 지그시 그 광경만을 바라보던 아야베는 순간적으로 타카마루에게서 시선을 떼어놓고 약 오 초간 잠시 허공에 눈길이 머물더니, 삽 후미코와 함께 자신이 판 함정 속으로 기세 좋게 뛰어들었다.

 "악, 키하치로 군! 네가 들어오면 어떻게 나가란 거야!"
 "어, 글쎄요……. 뒷 일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든 함정 속에서도 아야베는 타카마루를 계속 바라보고 있더니, 이젠 타카마루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닿을락 말락 한 거리까지 좁히면서 서로 눈길을 마주보고 있었다.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얼굴 피부에 느껴졌다.

 "아아, 제대로 걸렸네요. 타카마루 형."

 아야베가 여전히 타카마루를 바라보며 나긋한 목소리로 소근소근 말했다. 그 목소리는 아야베답지 않을 만큼 부드러웠다. 아야베는 자신보다 조금 큰 키의 금발 소년을 살짝 올려다 보고 있는 상황인데, 그의 눈길에선 알 수 없는 황홀함이 묻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친한 형을 대하는 눈빛이라기 보단 이성을 매혹하는 그런 분위기라고 하면 딱 들어맞다.

 "에, 무슨 말이야?"

 타카마루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간 이 자신과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를 좁혀오는 잿빛 머리 소년의 눈길이 당황스러운 듯 눈을 깜빡이면서 대답했다.

 "이 곳, 지금 저랑 타카마루 형 밖에 없는거죠?"

 아까 자신이 빠져 들어온 구멍의 입구, 그러니까 말하자면 하늘쪽을 살짝 흘겨다 보고 아야베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타카마루가 뭐라고 대답할 여유도 없이 타카마루의 화사하고 풍성한 금발을 한 움큼 가볍게 쥐고 마치 빗질을 하듯이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형이랑 한 약속 지금 기억났네요. 머리 손질은 필요없어요. 대신 좀 할 일이 있는데ー 마침 둘 밖에 없네요?"

 그 말을 하자마자 아야베의 얼굴에 무표정함이 사라지며 입꼬리가 귀엽게 올라가고 있었다. 타카마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의 커다란 눈동자를 그저 계속 깜빡이고만 있었는데, 또 그게 나름대로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마침내 얼굴이 완전히 환한 미소로 가득찬 아야베는 자신 앞에 서 있는, 본인보다 두 살이나 많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 정도로 귀여운 남자의 목에 매달렸고, 그렇게 타카마루는 아야베의 무게에 의해 뒤로 넘어갔다.





ーEpilogue.


 아야베와 타카마루가 함정 속에서 발견된 것은 신베가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기세 좋게 달려가던 길이었다. 신베 왈, 그 당시에 아야베와 타카마루는 서로에게 기대면서 졸고 있었다고 한다. 구출(?) 된 두 사람 다 제법 지쳐 보였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눈짓을 주고 받으며 옅게 홍조를 띄우는 것을 보아, 함정 속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나긴 했던 모양이었다. 뭐, 제법 신경쓰이지만 타인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신경을 끄도록 하자.


[120923] [반히로] 초가을의 감기

 

왔다갔다하는 날씨가 끊이질 않는다. 아침에는 얼어버릴 듯 차갑더니 해가 중천에 뜨면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뜨겁다. 그 덕분인지 주변의 사람들은 별별 감기를 다 달고 살고 있었다. 반이야 뭐 평소에 건강 관리에 충실하니 감기를 달게 될 일은 거의 없다고 보지만, 정작 문제는.

 

 "아, 안녕하세요. 반 씨! 오, 오늘 날씨가 참ㅡ"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길바닥에 엎어져버린 히로였다.

 

-


 "으으, 히로 몸 약한건 진짜 알아줘야 한다니까.."
 본의아니게 쓰러져버린 히로를 업고 집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반이었다. 갑자기 풀썩 바닥에 엎어지더니 숨을 간신히 토해내고 있었던 히로의 이마와 귓볼을 만져봤더니 그야말로 불구덩이 수준으로 뜨거웠다. 어쩐지, 며칠 전부터 살짝 켈록거리는 기미가 보이더니 결국엔 이 모양이었다. 안그래도 히로의 무게에 걸어가는게 힘든데 반의 체온과 히로의 체온이 맞닿아 있는지라 반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사실은 병원에 빨리 보내야 할 상황인데 반은 근처에 병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일요일이라 휴진할 가능성이 높아서 헛고생하기보단 빨리 집으로 데려가서 간호하는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이끌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반의 집이 작게나마 보이고, 어느새 현관 앞에 도착했다. 히로는 여전히 뜨거웠고 어설픈 숨소리만 계속 내었다. 현관문 도어락을 따고 들어가자 어두운 집안의 풍경이 보였다.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일단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히로를 침대에 눕혔다. 사실 반에게도 간병은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어디선가 들은 지식을 이용하여 체온을 먼저 재기로 했다. 반은 부리나케 거실로 달려가서 가져온 구급 약상자 속에서 체온계를 꺼내고 히로의 귓볼을 살짝 잡아당겨 귓속으로 체온계를 넣었다. 그 와중에도 만진 귓볼은 손난로 마냥 따끈따끈했다. 힘겨운 숨결을 토해내는 히로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볼에 손을 살짝 대어보니 이쪽도 뜨거웠다. 정말 이러다가 히로가 잘못될 것만 같아 그저 반은 불안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반은 히로의 귀에서 체온계를 빼내어 붉은 액체가 어느 숫자에 가있는지 확인했다. 액체는 거의 39도쯤 가까이에 멈춰있었다. 39도면 열이 정말 높구나ㅡ. 내심 반은 히로가 깨어나면 건강관리 좀 잘하라고 꾸중을 하고 싶었다.

 

 "우웅.."

 

 히로가 짧은 신음을 내뱉았다. 반은 아차 싶어 부엌으로 내려가 냉동실에서 얼음상자를 꺼냈다. 비닐에 얼음을 한 열댓개 쯤 담았을까 봉투 끝을 묶고 수건으로 감쌌다. 일단 빨리 히로의 열을 내리게 해야 한숨정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녀석, 왜 그렇게 몸이 약한 건지…. 지금 생각해보니 길바닥에서 갑자기 쓰러질 정도니 얼마나 앓았을까 싶었다. 다시 히로가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방 안에선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안고 게슴츠레 눈을 뜨고 히로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깨어난거야, 히로?"

"에에, 네.. 네엣?"

 

 히로는 얼음주머니를 들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반을 보고 있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아침에 나왔을때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정신이 몽롱했던 것까진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백지장 마냥 생각나는게 없었고, 지금 왜 반이 얼음주머니를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가지 체감할 수 있는건 지금 자신의 몸이 펄펄 끓어오르듯이 뜨겁다는 것이다.

 

 "히로, 잠깐만ㅡ"

 

 반은 히로의 앞머리를 살짝 제껴버리고 얼음주머니를 살포시 히로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수건으로 감쌌긴 했지만 얼음의 찬 기운이 히로의 이마에 전해져 왔다. 반은 자신의 손을 히로의 뺨에 올려놓고 살짝 잡아당겼다.

 

 "왜 그렇게 자주 아픈거야, 걱정되잖아…. 응?"

 "죄, 죄송해요, 반 씨.."

 

얼음주머니가 이마에 있어 자유롭게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히로가 반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자신때문에 반이 걱정하는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가 너 아플때마다 간호해 줄테니까."

 

반이 뺨에 얹었던 손을 이불속에 숨어있던 히로의 손과 맞잡았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숙여서 눈높이를 히로와 맞춘 다음 자신의 입술을 눈앞에 있는 히로의 뺨에 부볐다.

 

 "너도 나 아프면 내 곁에 있어야 한다?"

 

안그래도 열때문에 충분히 붉어져 있는 히로의 얼굴이 한번 더 화끈거렸다. 갑작스러운 반의 행동에 대답은 못하겠고 히로는 그저 눈만 빠른 속도로 깜빡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쩔줄 몰라하는 히로를 보고 있으니 반은 그저 귀여워서 손을 꽉 잡고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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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로그 (2013. 06.06)


  가끔씩, 정말 가끔씩 아무도 없을 때가 있다. 아니, 정말로 내 주변에 아무도 없는 날이 있다는 뜻은 아니고, 가슴 속이 텅 비어서 그 누구도 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기를 바랄 때. 굳이 일일이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냥 단순한 외로움인지, 고독감인지, 아니면 슬럼프인지. 여러모로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 때 말이다. 그 감정이라는 게 참 별난 것이 어제까지만 해도 그리 좋아라 하던 호랑이도 갑자기 뵈기가 영 껄끄럽고,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떠들고 놀기가 참 재밌던 급우들마저 불편하게 느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여간에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틀림없다. 
  지금 내가 이러는 이유는 따로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방금까지 베시시 웃고 다니던 녀석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갑자기 돌변하는 일은 아마 없을 테니까. 어쨌던 하고 싶은 말은, 기르던 강아지 한 마리가 조금 전에 죽었다.

  사실 난 키우던 동물이 갑자기 죽는다는 것에 아주 익숙하다. 이러고 저럴 것도 없이 생명체라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운명을 타고 났으니까. 그 운명이라는 건 단순히 내가 슬프다고,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바란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떠나 는 동물들을 미련 없이 놔주려면 어쩔 수 없이 이 일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내 스스로 마음을 죄더라도 어떻게든 적응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 생각으로 여태까지 동물들을 길러 왔다. 언젠가 그들이 맞을 죽음을 위해, 숨쉬며 살아가는 순간이라도 잘 보살펴 주고 끝까지 행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게 내 일이자 숙명이라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다. 꼬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로 이미 숨을 거두어 차갑게 식어가는 갈색빛 털을 가진 강아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내 몸도 그처럼 싹 굳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에 묶인듯한 느낌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순간 어렴풋한 오랜 기억 속 한 장면이 눈 앞에서 물결지어 어른거리더니 어느 순간 지금의 광경과 겹쳐졌다. 쓰러진 강아지 주변에서 춤을 추는 거북한 뿌연 연기, 몰려오는 마을 사람들, 굉음, 수풀. 

 직감적으로 알아채, 4년 전이다. 처음으로 내 실수로 친구를 잃었던 그 끔찍한 날의 오후. 이마가 점점 뜨거워짐이 느껴지다가, 이어 사물에 초점이 맞춰지지를 않는다. 내 몸들의 감각기관 하나하나가 나를 괴롭힐 작정이라도 한 듯이 다들 내 말에 경청할 생각을 않는 것 같았다. 화약 특유의 퀘퀘하고도 알싸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만해도 고통스러웠다.


  숨을 쉬고 있지 않아 그저 갈색 덩어리로만 보이던 강아지가 갑자기 내 방의 사물들과 함께 이리저리 흔들리다 한꺼번에 뭉쳐져 색이 섞이며 몇 번 흐리게 깜빡이더니 어느새 새하얀 눈의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색은 내가 화약으로 터뜨려버린 아이의 색이었다. 순간 입에서 헉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무슨 끔찍한 환각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소름이 쫘악 돋아 전율이 울렸다. 아까부터 끊임없이 마구 흐트러지던 배경들이 점차 제 자리를 잡는 듯 하다가도 다시 서로 정신없게 엉켜지고 있었다. 그 엉킨 덩어리들은 색이 탁하여, 자욱한 안개이자 화약이 터져나온 연기로 보였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지금 이 악몽같은 순간을 다른 누군가에게도 보여줘서 내 고통을 알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이 곳에서 단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화가 났다. 그 암흑같은 과거를 쓸데없이 반복 재생하는 이 알 수 없는 환상에 분노가 치밀었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그때의 난 충분히 괴로웠었고, 물론 지금도 그 일이 떠오를 때마다 고통스럽다. 나는 이 순간에 화를 내도 마땅하다.

  선생님이었나, 하여튼 누군가가 말했지. 임무를 수행하다가 몸의 어느 곳이 마비되거나 이상한 환각에 빠지려고 하면 일부러로라도 신체에 고통을 줘서 깨어나라고. 불현듯이 그 말이 떠올라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순간에서도 품 속에서 작은 쿠나이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금속을 미친듯이 부들부들 떨리는 팔에다 가져댔다. 

 "더이상 내게 이런 아픔을 주지 마…… 제발!"


  사실 힘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지만 내 와인색 닌복은 생각보다 쉽게 찢어졌다. 팔에 그 차갑고도 날카로운 감촉이 닿았다가 곧이어 무엇인가 파고드는 느낌이 든 그 순간, 거짓말같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휘날리던 가구들이 언제 자기들이 날아다녔냐는 듯 아주 얌전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려던 초록빛 대나무 수풀들과 소름이 돋을 정도로 희던 눈들도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 뿌옇게 시야를 흐리던 안개, 혹은 연기들도 누군가가 다 들이마셨는가 조금도 흔적을 남기 지 않고 사라졌다. 귓가는 이제 고요하다. 안쓰럽게 숨을 쉬지 않고 있던 갈색의 강아지도 아까전과 같은 자리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긴 꿈을 꾼 듯했다. 물론 이게 꿈이 아니란 것은 알지만.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지금 내 왼쪽 팔뚝에 피가 강 상류에서 물줄기 흐르듯이 마구 솟아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딱히 경악하지는 않았다. 방금 그 순간은 이 상처 따위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공포스러우니까.
  이번으로 새삼 느끼지만, 트라우마라는 녀석은 참말로 무섭다. 언제 덮쳐와서 언제 가라앉을지 알 수가 없는 놈이니까. 그렇다고 남에게 누설하기도 두렵고. 불쾌하다.

  뭐, 어쨌던지 바닥에 피가 흐르면 보기에 거북하니까 빨리 의무실에나 가야겠다. 웬만해서 가는 길에 아무도 안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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