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726] [사부로지&사콘] 졸업 이후 낙서

 

 

 

 "카와니시 사콘?"
  금속과 금속이 서로 마찰함으로써 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핏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칼에 맞은 누군가의 안타까운 비명이 피바람으로 가득 찬 허공에서 한꺼번에 섞이고 있던 와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무 뒤편에 숨어서 자신과 다른 색의 닌복을 입은 적의 심장을 노리고 있던 닌자 한 명의 행동을 붙잡았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매우 익숙하고도 그리운 목소리에 지금 자신이 전쟁에 참전 중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모양인지 아주 잠시의 고민도 없이 자신을 부른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사콘.

 "사부로지?"
  그가 고개를 돌린 쪽에서는 매우 낯이 익은 실루엣의 닌자 한 명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살짝 삐죽거리는 앞머리에, 적당히 큰 키, 잘 기른 뒷머리. 어딜 보나 2년 전 졸업 이후로부터 연락이 끊겼던 그리운 친구, 사부로지였다.
  자신을 부른 이가 사부로지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된 순간 사콘은 친구와 재회했다는 사실에 들떠 반사적으로 쿠나이를 버리고 사부로지에게 달려갈 뻔 했다. 2년동안 소식이 없어 생사를 알 수도 없었던 그리운 친구를 이제서야 만났으니, 이건 당연히 기쁜 상황 아니겠는가.
  하지만 예상외로 그는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사부로지가 입고 있는 닌복이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이 심장을 노리고 있던 닌자의 닌복과 생김새가 같았다.


*


  두 사람 다 어느정도 상황 파악이 끝난 모양이었다. 처음 잠시동안 느꼈던 반가움은 온데간데없이 어느새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만이 감돌고 있었다.
  사콘은 고개를 살짝 들어서 한 때 단짝 친구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울창한 나뭇가지들의 그림자에 묻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사부로지는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는 쌀쌀맞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말로 슬프게도 지금 상황은 2년만의 재회와 상당히 어울리지 않았다.
적으로 만난 그들은 인사 한 마디도 없이 각자 자신의 무기를 끊임없이 쥐었다 놨다 하면서 내적 갈등만 계속 겪고 있었다. 저 자는 과연 적인가, 아니면 나의 그리운 친구인가.
  그러던 와중, 갑자기 그들의 옆에서 보록화시 하나가 펑, 하는 굉음을 내며 터진다. 자욱한 회색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한 번 '에취!'하며 기침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이러고 있다가는 분명 둘 다 죽어."
  입 속에 감돌던 긴장감 섞인 타액을 꿀꺽 삼킨 후 여전히 한 손으로는 쿠나이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콘이 무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럴 것 같네."
  그러자 건너편에서도 똑같이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응."
  마지막 대화가 끊기고, 가죽 칼집에서 장검이 뽑히는 섬뜩한 소리와 여러 개의 쿠나이가 제들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그리고 서로에게 달려드는 발소리만이 핏빛 허공을 울린다.


  죽임을 당하는 자도, 죽이는 자도 비명을 지르는 전쟁이라…….






[130717] [로지사콘] 무제

 

 

 



  또 네게 상처를 냈다.
  늘 생각해오는 거지만, 내가 너를 해하는 데에 별다른 사연은 없다. 굳이 이유 몇 가지를 대 보자면, 오늘은 도서위원회가 단체로 밤 늦게까지 도서관의 책들을 정리하는 날이었고, 아무도 바깥을 어슬렁거리지 않는 늦은 밤이었으며, 날 가만히 올려다보는 네 말간 눈동자가 오늘따라 슬프게 보여서였을까. 만약에 누가 지금 내 머릿속을 읽고 있다면 분명히 미쳤다며 혀를 차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동화스러운 일은 없으니 상관없다.
  단순했다. 내가 꽉 쥔 주먹을 든 이유는, 품 속에서 쿠나이를 꺼내들어 사납게 협박을 한 이유는, 눈을 부릅뜨며 널 내려다본 이유는,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던지간에 아랑곳없이 험한 말을 내뱉은 이유는 참말로 단순했다.
  네 그 옥구슬같은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떨어졌으면 했기 때문에.

 "사콘."


  내 목소리가 방 안에 가득찼던 적막을 깨뜨렸다. 눈을 가만히 내리깔자 너는 마치 비에 젖은 고양이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겠지, 갑자기 덤벼들어 자신을 공격하는 룸메이트를 그 어떤 누가 고운 얼굴을 하고 볼 수 있을까. 나같아도 무서워했을 것이다. 당연한 거야.
  하지만 이렇게 합리화를 시도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 싸하게 들더니 갑자기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너, 지금 날 무서워하는 거야? 왜지? 우린 친구잖아? 어째서 그렇게 시선을 피하고 앉아 있는건데? 내가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끔찍해?'


  차마 내뱉지 못하고 머릿속만 뱅뱅 맴도는 말과, 의도하지 않았는데 또다시 올라가는 손. 그러던 와중에 잔뜩 붉어져 있는 너의 뺨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광대뼈가 유난히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언가 싶어 자세를 바꾸지 않고 위에서 그 붉은 얼룩과 같은 것을 계속 바라보니, 피멍이었다.
  나는 손찌검을 휘두르려 위로 들었던 손을 네 오른쪽 광대뼈에 살짝 가져다 댔다. 상처에 손 끝이 닿으니 쓰린 감촉이 아파서인지, 내가 두려워서인지 모르겠지만 네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모를 줄 알았겠지만, 넌 딱 봐도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파?"


  너무나도 당연한 걸 물어보자 넌 고개를 살짝 떨구고는 머리를 아래위로 가볍게 끄덕인다. 그 작은 행동은 기가 잔뜩 죽어버린 새끼고양이와 닮아 있었기에 나름대로 귀여웠다. 그렇게 네 얼굴 위에서 잔뜩 부어오른 피멍을 살살 어루만지니 그 쓰라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온 감각기관을 통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이질적인 감각에 아주 잠깐동안 네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도 잠시였다.

 "너, 울지 않아?"


  감정이 실리지 않은 내 한 마디에 갑자기 아무런 미동도 않는 너. 그런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장 큐사쿠가 와 주었으면' 하는 생각? 나에게 달려들어 이로 내 팔을 물어뜯을 생각? 아니면, 죽고 싶다는 생각? 어느 쪽이던 상관없다. 그것이 어떤 묘안이던간에 어자피 허구들에 불과하니까.
  꼴에 제도 남자라고 혀를 씹어가며 겨우 울음을 참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네가 눈물을 보일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누가 이기나 한 번 해 보자. 

 

 


[130707] [로지사콘] 몽유병

 

 

 

  금방이라도 새까만 하늘의 빛나는 저 별이 지상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어느 날 새벽이었다.


 "……아."

  주황의 투명한 빛을 뿜어내는 촛불이 소년의 엷은 입김에 살짝 일렁인다. 한숨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먹물 묻은 붓이 무언가의 힘에 열심히 철퍽이며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 종이 위에서 춤을 췄는데, 아무래도 그 무언가의 힘을 가하는 자의 얼굴이 썩 좋아뵈지가 않았다. 굳이 표현을 해 보자면 연 며칠간 잠을 설쳐버려 이미 짜증이 머리 끝까지 솟아오른, 그런 퀭한 얼굴. 그는 잠시동안 나무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갑자기 붓을 휘갈기던 종이를 집어 들더니 안 그래도 다크서클 때문에 어두워진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곧 갈기갈기 찢어 버리곤 했다. 그 덕분에 그의 책상 가장자리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정체불명의 종잇조각이 수북히 쌓여 있었는데, 그도 그것들이 제법 거슬리기는 거슬렸었는지 사콘은 수시로 종이의 잔해들을 바닥으로 밀어냈지만 금세 다시 쌓여 원상태로 돌아오고는 했기에 이제는 아예 신경을 쓰지도 않는 눈치였다. 멀쩡한 종이가 마구 구겨지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온다.

 "너희, 숙제는 다 끝내고 자는 거냐? 사부로지, 큐사쿠."


  사콘은 잔뜩 구겨져서 흡사 공 모양으로 변한 종이뭉치를 자신의 급우들이 누워 있는 흰 침구 쪽으로 힘껏 집어던진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는데, 그는 곧 그 행동에 대한 멍청함을 깨달았다. 자는 녀석들에게 말을 걸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혼잣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 목소리가 혼자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자 사콘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고 상 아래서 새로운 종이를 집어들어 책상 위로 올렸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먹물 잔뜩 묻은 붓을 들어 다시 무언갈 열심히 쓰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그의 낯빛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불쌍한 종이만 희생된다.

  그러던 때였다. 정적으로만 가득 찬 줄 알았던 방의 구석에서 큐사쿠인지, 사부로지인지 모를 누군가가 이불을 계속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 거슬리는 것이 그 소리도 잠깐 들려오면 신경이 쓰이진 않았을 텐데, 한 번 이불을 뒤척이던 소리가 잠깐 끊기는가 싶으면 또 시작되고, 얼마 안 지나 방이 완전히 조용해지면 드디어 저 아이가 자는가 싶어 마음을 놓자마자 다시 부스럭이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둘 중 한 명이 깨어난 듯 싶었는데, 가뜩이나 새벽인지라 신경이 왕창 예민해져 있는 사콘에게 그 잡음은 방해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누구 일어났어?"

  사콘이 허공에다 대고 묻는다. 이번은 급우들의 대답을 기대한 질문이었기에 그는 아랫입술을 살짝 앙물고 되돌아올 말을 기다렸지만 실망스럽게도 그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조금 상황에 걸맞지 않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오래된 기숙사의 나뭇바닥이 삐걱, 하고 눌림과 동시에 살짝 무게감 있는 발소리. 그 투박한 소리는 아주 긴 간격으로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쿵, 삐걱. 쿵, 삐걱. 여태껏 아무런 대답도 없다가 갑자기 왜인지 모를 발소리만 들려오니 사콘의 몸에 살짝 긴장감이 감돈다. 아직 어린 그의 머릿속은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귀신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새벽, 바람 부는 밤, 곧 꺼질 듯한 촛불. 분위기는 딱 알맞았다. 사실 정말로 귀신이 나타날 일은 없지만, 살짝 두려워진 사콘은 불안감에 고개를 아주 살짝 돌려 사부로지와 큐사쿠가 누워 있어야 할 흰 침구의 무리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곳에는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채로 얌전히 자고 있는 큐사쿠밖에 없었다.

 "사부로지?"

  차마 사부로지가 어디에 있는가 볼 용기는 없었고, 어쩐지 다급해지기만 한 목소리. 아까 이불을 뒤척인 사람도, 끼익거리며 나무 바닥을 밟은 사람도 사부로지라 생각했던 사콘은 입술을 혀로 살짝 핥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입으로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고, 그에게 점점 가까워져 오는 발걸음만이 그 대답을 대신했다. 너무나도 조용한 방이었기에 그 소리가 더욱 두드러지게 들린다. 누군가의 걸음에 살짝 속도가 붙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책상 위에서 안쓰럽게 흔들리던 촛불이 갑자기 훅 하고 꺼졌다. 그리고 사콘은 자신의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 자, 잠깐!"

  기묘한 감촉과 목소리. 등 뒤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올라옴을 직감한 사콘이 급히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아깝게도 그것은 곧 사부로지의 돌발적인 행동에 의미 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사콘의 흰 목을 둘러 감싸는 소름끼치는 그의 팔. 사부로지는 정신이 나간 듯한 손으로 그의 목을 더듬다가도 이내 의미불명의 뜨거운 숨을 내뱉는 것이 아닌가. 그 끈적거림에 사콘은 자신의 하반신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알 수 없는 전율이 마구 울려대는 것을 실감했다. 평소 같았으면 지금 뭐 하냐고, 또 장난이냐며 그를 다그쳤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의 사부로지는 이상하다. 사콘은 몸이 경직되어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부로지의 팔이 사콘의 목을 타고 조금씩 내려가더니, 이번에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그의 어깨를 강하게 껴안는다. 안쓰럽게도 사콘은 현재 팔이 굉장히 아픈 상태였던지라 자신의 어깨가 짓눌리는 그 순간 '아!' 하는 짧은 비명을 자아냈지만, 그 소리를 사부로지는 듣는지 마는지 계속 꼭 안고 있기만 했다. 사부로지의 숨결은 사콘의 귓 속을 파고들었고, 이어 뺨에 닿아 붉게 달아 오르도록 만든다. 길쭉한 뱀과 같은 그의 팔이 위축되어 있는 어깨를 지나 팔뚝까지 휘어감는다. 사콘은 계속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아직도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 한 눈치였다. 무어라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입안엣소리로 웅얼거릴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황색 뱀은 그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이미 얼굴이 홍당무마냥 완전히 새빨개져버린 사콘. 그런 사콘의 귓전에다가 살짝 벌린 입술을 가져다 대는 사부로지.

 

 "……사콘, 나 여태까지……"

 

  의미심장한 한마디, 귓 속을 파고드는 날숨의 온기와 온 몸을 타고 오르락 내리락하는 전율. 그것들은 새벽에 급작스레 찾아온 몽유병을 정당화시키기에 아주 충분했다. 숙제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그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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