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027] [쿤밤] 낙서

 

 

 

 '깨달았어요. 저도, 저도 언제나처럼 멀쩡히 살아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걸요. 그래서 연습 중이에요. 언제가 될지 모를 마지막 날에 미리 익숙해지기 위해서, 만약 제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게 될 날을 위해서. 그때 아무도 울지 않게 하려면 지금부터 미리 연습해야죠. '

 

 

*

 

 

 

  나는 거짓말 같던 너의 한마디를 새겨듣지 않았다. 마치 깊은 꿈이라도 꾸는 듯했던 그 오묘한 목소리는 곧 있을 시험에 골이 썩어가던 내 청각을 자극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일까. 흐릿한 기억 속에서나마 네 음성으로 조용히 읊히던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을 되새기려 아무리 머리를 쥐어 뜯어봤지만, 삭막하다. 아득하다. 까마득하다. 갱문(更聞)을 원하는 염원의 꽃들이 머릿속에서 만개하면 어쩌겠는가, 정작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 안타까운 일이지만, 밤 씨는…….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이후로부터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목소리가 가물가물하다. 그저께 저녁, 그러니까 시험의 층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앞둔 때. 안부를 물으러 방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밤은 자신의 방에서 어마어마한 피를 쏟아낸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경악을 금치 못했던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할 겨를도 없이 그의 곁으로 달려가 이름을 수없이 되뇌었는데, 그렇게 한 몇 초가 지났을까. 갑자기 아무런 미동도 없던 밤의 얼굴 근육이 살짝 실룩이더니 그가 가볍게 웃었다. 키득, 하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안타깝지만 살아 있을 가능성은……"
  잔뜩 벙져 있던 나를 살며시 올려다보며 미소를 짓던 밤. 만약 별이라는 것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이 아이의 눈망울과 똑같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뇌리를 스쳤었다. 어쨌든, 참말로 윽박지르기도 뭣해진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뭐 해?'밖에 없더라. 제 얼굴에 묻어 있던 시뻘건 피――아니 케찹을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내며 '죽음 연습이요.'라 태연하게 대답하던 그의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없을 것 같군요."
  그로부터 네가 웃으며 한 문장을 더 꺼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기억에 없다. 분명 내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을 법한 한마디였던 것 같은데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다. 혹시 선별인원 중에 타인의 기억을 삭제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있었던가. 아니면 불필요한 영상이라 판단하여 뇌가 스스로 삭제해 버린 건 아닐까. 끝까지 해답이 안 나오자 나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거머쥐었다. 손 틈을 타고 빠져나온 투명하게 푸른 머리칼들이 '멍청이, 멍청이.'라며 날 우롱하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은 온통 새하얘져 이제는 눈앞까지 희미하고, 그렇게 나는 어딘가에 홀린 듯, 조금씩 정신을 놓았다. 옛날부터 그래왔듯이 내 모든 결말의 무대는 후회의 바다다.  

  영원히 내 옆을 지켜줄 것만 같았던 친구가 이제는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옆으로 고개만 살짝 돌리면 언제나 환히 웃으며 날 바라보던 친구가, 친구가,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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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21] [로스알바] To.핀언니

 

 

  입을 맞춘다는 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가.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따스한 체온을 입술로 느낄 수 있다는 건 참말로 기발한 생각인 것 같다. 키스라는 애정표현 방법을 떠올려낸 사람은 어디 사는 누구인가 싶었던 것이, 입맞춤은 그런 원시적인 부분에서부터 나를 깊은 생각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조금 유치하긴 했지만.

 

  우리는 주변에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 척박한 황무지를 그저 무료하게 걷고만 있었다. 밀려오는 심심함에 지루함을 달래 줄만한 것이 무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 만목황량한 땅 위에서 그런 오락적인 걸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차라리 귀엽던, 포악하던 몬스터 한 놈이라도 튀어 나오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거기서 더 나아가자면, 빨리 그 마왕인가 뭔가 하는 녀석을 잡아서 죽음의 구렁텅이에 갖다 바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영악한 생각이 몇 번 뇌 속을 쑤시고 지나가던 와중에, 이상하게도 내 앞에서 계속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용사의 등판이 자꾸 눈에 밟혔다. 심심한데 저 등을 뒤에서 발로 한 번 뻥 차 볼까나. 그러면 저 깐깐한 용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내게 보일까. 아픈 등에 손을 갖다대고 바락바락 소리치며 도끼눈을 뜨고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볼까, 아니면 눈가에 투명하게 눈물을 머금으며 입술을 깨문 채로 내 발을 원망스럽게 째려볼까. 생각해 보니 두 상황 다 결론적으로는 날 쏘아보고 있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머릿속으로 그 표정들 하나하나를 상상해 보니 제법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녔다. 나는 한 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며 무릎을 약간 굽혔다. 준비 자세였다.

 

 "아."

  불현듯이 무언가가 뇌리를 팟 하고 스쳐 지나감이 똑똑히 느껴졌다. 사실 이런 새디스트적인 행동에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질려 가고 있던 나에게 새롭게 떠오른 나름 신선한 생각이었다. 며칠 전부터 끊임없이 뇌 속을 후벼파고 들던 고민, 덕분에 머리가 지끈지끈했던 그것을 용사 씨에게.

 

 "용사 씨."

 "응?"

  늘 그렇듯이 '알바'가 아닌 '용사 씨'라는 호칭으로 그를 부르자마자 몇 발짝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소년은 마치 말 잘 듣는 개 마냥 고개를 홱 돌리며 그 맑은 눈빛을 내게 꽂는다. 멍청해 보이긴 하지만 또 그만큼 순수하다.  

 

 "심심한데 뭔가 재밌는 거 필요하지 않아요?"

  그에게 던질 첫 마디에서는 무조건 본심을 숨겨야 한다. 저리 맹한 얼굴로 다니긴 해도 생각보다 약삭빠른 면이 있는 용사가 '혹시 또 이상한 걸 꾸미고 있는 거 아냐?'하는 투로 내게 되물으면 조금 곤란하니까.

 

 "재밌는 거?"

  다행히도 위기는 넘겼다. 이 소년은 생각 그 이상으로 아둔한 모양이다. 나로써는 편해서 좋지만.

 

 "잠깐만 가까이 와 봐요, 괜찮은 게 떠올랐거든."

  그 '괜찮은 것'이라는 건 사실 며칠 전부터 계속 내 머릿속을 정신없이 맴돌고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지금 막 떠오른 척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참 멋있는 연기다. 말을 끝내고 팔을 앞으로 살짝 내밀어 손 끝을 가볍게 까닥이니 바보같은 용사는 의심하는 기색은 전혀 없이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하나, 둘씩 내딛는다. 순진함과 헷갈릴 것 같은 그 미련함에 풉, 하고 그만 웃음을 내보낼 뻔 했지만 어찌어찌 참았다. 조금씩 가까워진다. 팔을 뻗으면 그 말랑말랑한 뺨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숨을 내뱉으면 따스한 입김이 얼굴에 느껴지는 거리까지. 그렇게 우리의 거리는 점차 좁혀졌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 입술.

 

 "있잖아요."

  나의 끈적한 눈빛을 과연 그는 알아챘을까. 아니, 표정으로 봐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다행이다. 덕분에 더 즐거운 반응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용사의 말간 눈망울에 내 얼굴이 얼핏 비쳤다. '어떻게 하면 눈이 그렇게 맑습니까?'라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기껏 만들어 놓은 이 분위기가 한순간에 와장창 깨져 버릴까봐 그냥 관뒀다. 허리를 살짝 앞으로 굽히자 그의 엷은 앵둣빛 입술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핏물이 스며든 것 같아 소름끼칠 정도의 섹시함을 연출하는 새빨감도, 분홍의 장미꽃과 닮아 있는 사랑스런 분홍도 아닌 그저 어정쩡한 색이었지만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나는 이런 입술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잠깐의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계속되는 응시에도 질려가던 참에, 순결로 가득찬 그의 살짝 열린 입술을.

 

 "앗."

  재빠르게 용사의 목을 휘감는 나의 팔에 그가 내게 반격을 할 틈은 없었을 테다. 겹쳐진 입과 입, 그 짧은 순간 덕분에 깜짝 놀라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망울. 그 눈이 참말로 귀여워서 당장에라도 손을 번쩍 들어 엷은 갈색빛 머리칼을 마구 쓰다듬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지금 아래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무방비 상태인 이 입술 사이에 내 혀를 집어 넣고 그대로 돌진? 아니면 계속 이렇게 뜨뜻한 마찰만? 어느 쪽을 선택해야 더 즐거울까. 즐거움, 즐거움, 즐거움. 그게 내 키스의 본 목적이었다. 과연 용사는 전자를 원할까, 후자를 원할까. 아니 것보다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서의 입맞춤이라니, 이거 나름대로 로맨틱한걸. 아, 말을 걸고 싶어. 살면서 이런 경험 한 번도 못 해봤을 안쓰러운 용사에게 '처음 치고는 괜찮았나요?'라 잔뜩 비아냥거려주고 싶어. 지금 얼굴을 잔뜩 붉히며 여전히 눈을 치켜뜨고 날 매섭게 바라보고 있는 이 반응도 나름 재밌지만, 그 말을 했을 때 돌아올 반응이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어쩔까? 어쩔까? 지금이라도 '서프라이즈!'하고 소리치며 입을 뗄까?  

  그러던 와중.

 

 "뭐, 뭐야!" 

  아뿔싸. 먼저 내쳐졌다.

  수줍게 미간을 찌푸린 용사의 양손에 밀려 본의 아니게 몇 발짝 뒤로 물러나버린 내가 조금 안타까웠다. 역시 고민은 깊게 할만한 게 못 된단 말이지. 방금까지만 해도 내 입과 밀착해 있었던 아랫입술을 앞니로 살짝 깨물며 씩씩거리고 있던 용사는 지금 화가 상당히 많이 난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조금 뿌듯하다.

 

 "재밌었어요?"

  아까 하고 싶었던 말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얄미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이번에도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줄까? 

 

  어, 잠깐만. 용사 씨, 어디 가요? 즐거운 대답은? 흥미진진한 표정은? 지금 얼굴 완전 빨개진 상태로 뒤돌은 거 맞지? 잠깐만. 기껏 키스했더니 고작 이거밖에 없어? 정말로? 뭐야. 기대를 잔뜩 하게 했으면 얼른 날 재밌게 만들어 줘야지. 설마 이거로 만족하라는 소리야? 아니, 저 용사가……? 

  결론은,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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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사콘] [130814] 너에게 마지막

 

 

 

  누군가가 일부러 하늘에서 벚꽃잎을 바구니 채로 마구 쏟아붓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교정이 떠나갈 듯 울려 퍼졌던 아쉬움과 축하가 뒤섞인 박수 소리는 꽃잎과 함께 허공을 타고 흘러가던 건들바람과 같이 사그라들었다. 아직은 칼날처럼 소름 돋는 차가움을 가득 품고 있던 그 바람의 조각이 6학년, 아니 이제는 단 몇 분 만에 인술학원의 졸업생이 된 두 아이의 잔뜩 빨개진 뺨을 살짝 베듯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막 인술학원을 나와 교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머지 두 아이는 가슴 찡했던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눈물을 삼키며 짧은 작별인사와 함께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고, 이제는 남은 그 둘이 떠날 차례였다. 방금 전에 6년의 생활을 마무리짓는 졸업식도 끝났고, 그와 더불어 엄청난 박수갈채도 잔뜩 받았으니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자신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했다. 인술학원이라는 틀 안에 굳게 갇혀 있던 그런 고립된 삶이 아닌, 스스로가 설계해야만 하는 그런 인생 말이다. 그런 점에서의 졸업이라는 건 참 해방적이고도 씁쓸했다.
  슬슬 꽃들이 겨울 내내 숨겨왔던 꽃잎을 깨워내고 있는 걸 보니 이제 계절은 확실히 봄이었지만 덜 따뜻해진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하.'하고 짧게 숨을 내뱉으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눈 앞에서 희멀건 작은 구름이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그 사실이 어이가 없던 사부로지는 흰 입김의 뭉치를 보며 허, 하고 간결하게 웃었다.

 "사부로지."
  야외였음에도 불구하고 확연히 느껴지는 어색한 고요함을 깨뜨리고 조용히 입을 여는 사콘. 그 모기만한 목소리를 사부로지는 그만 알아듣지 못 할 뻔했다.

 "어?" 
  그리고 사부로지의 대답은 늘 불친절하고 짧다. 6년 전에도 그랬고, 또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점만은 한결같았다.

 "우리……"
  사콘의 목소리는 아닌 듯 하면서도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눈물이 떨어지기 전의 그런 떨림이었다.

 "적으로 만날 수도 있을까?"
  마지막 문장은 목 속에서 흐르고 있는 아픈 눈물 아닌 눈물들 덕분에 거의 알아듣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그가 뒤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사부로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살짝 떨구고 있던 시선을 위로 치켜들어 올려 허공에 맞추는 사부로지.

 "당연하지."
  그 잔인하고 안타까운 현실을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수긍한다. 그 솔직한 대답에 차마 무어라 할 말이 사라져버린 사콘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기만 하고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또 찾아온 정적은 그들이 이 뒤에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고민하고 있는 시간과도 같았다.

 "뭐, 이제 볼 일도 없겠구만?"
 "아마 그렇겠지."
  사콘과 사부로지는 고개가 아닌 시선만을 살짝 돌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표정에 발그스름한 색깔. 얼핏 봤을 때 약간 닮았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모습들이었다. 외형이 아닌 느낌이 말이다.

 "그러면 나, 하고픈 말이 하나 있는데."
  갑자기 사부로지가 사콘의 뺨을 또렷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 낮게 깔린 목소리는 때 아닌 긴장감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뭐?"
 "앞으로 볼 일 없을 거라며. 그러니까 할 말은 하려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라도 하는 듯이 둥그런 눈망울을 요란하게 몇 번 깜빡이는 사콘. 여태까지 함께 지내오며 사부로지가 이렇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저런 진지한 말을 내뱉는 것을 본 기억이 사콘에게는 전혀 없었다. 자신과 그가 한 말대로 이제 서로 얼굴을 맞대는 일도 적을 테고, 언제 어떻게 또 만날 지 모르는 친구의 마지막 고백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는 전혀 만무했기에 사콘은 사부로지가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동자는 봄빛과 닮아 있어 맑았다. 그 초롱초롱한 눈을 꾹 눌러 감으며 숨을 들이쉬는 사부로지.

 "오래 전부터 너를."
  긴장감이라는 이름의 굵은 실이 그들 사이를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좋아하고 있었어."
  '좋아하고 있었어.' 좋아하고 있었어, 좋아하고 있었어. 좋아해. 좋아했어. 좋아……. 놀람으로 잔뜩 커지는 눈망울. 말이 끝난 사부로지의 입이 다시 닫히자마자 사콘의 머릿속은 여러가지 형태의 '좋아.'로 가득찼다.
  좋아해? 좋아한다고? 좋아해, 좋아했었어…… 응, 그러고보니 나도.

 "잠깐만. 사부로지!"
  그가 다시 넋을 되찾았을 때 사부로지는 이미 등을 돌리고 제 갈 길을 떠나려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자신의 외침에도 멈추지 않는 그 눈에 익은 몸뚱아리가 참말로 매정해서 사콘은 그만 울컥했다. 그렇게 몸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무슨 한이 있더라도, 저 고백을 들은 이상 이 말은 꼭 해야만 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너만 좋아했던 건 줄 알았어? 나, 나, 나도 너를……!"
  15년 살면서 한 번도 내뱉어보지 못 했던 말이 이상하게 지금따라 술술 잘 나왔다. 마지막 마디에 앞으로 계속 향하던 사부로지의 등이 멈춰섰다. 너를, 너를.

 "좋아한단 말이야, 바보같은."
  그 목소리는 굉장히 작았다. 바로 옆에 사람이 있었더라면 아마 그 사람도 알아듣지 못 했을 만큼의 음량이었다. 사콘은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창피함과 안타까움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주먹 쥐고서. 사부로지는 끝의 한 마디를 듣지 못 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래뵈도 6년간 함께 지낸 룸메이트이기에 가능한 마법이었다. 사부로지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길 한가운데서 우뚝 멈춰선 채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멍하니 초점을 맞추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입 속에 고여 있던 타액을 목으로 꿀꺽 넘긴다.

 "사콘."
  아까보다 훨씬 낮아져 있던 목소리였다. 그랬기에 더욱더 또렷하게 귓 속을 찌르고 들어온다. 사콘은 떨궜던 머리를 서서히 들어올렸다.

 "설령 내가 널 적으로 만난다고 해도…… 난 널 공격하지 않을 거야."
  그 한 마디에는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여러가지 감정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할까, 굳은 결심이라고 할까. 사콘의 눈이 사부로지의 머리를 향할 때 즈음, 그 새까만 구슬같은 눈망울은 투명한 액체 한 방울에 젖어 있었다.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지만 확실히 분노의 의미는 아니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 짧고 굵은 세 글자는 어찌나 사콘의 마음을 잘도 후벼파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허공을 향해 들어진 눈동자와 그 들어진 눈동자를 만나고자 하여 뒤돌은 눈동자가 서로 만나자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 아닌 웃음이 동시에 피었다. 쓸쓸함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슬픔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제 와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그 아쉬움을 서로를 향한 미소로 승화시킨다.
  마지막 순간에서 입술을 깨물지 말라. 눈물을 흘려야 마땅할 상황에서의 깨문 아랫입술은 되도 않는 자존심 세우기에 불과하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상대를 위해 한 번쯤은 필요한 짠내 나는 눈물의 시간.
  하늘에서 흐르는 연홍빛의 벚꽃은 그 눈물을 애써 가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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