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급자족 소설 백업용 블로그입니다.

네이버에서 wiki_119 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던 블로그를 초기화시키며 소설들만 이쪽으로 다 옮겼습니다.

아무쪼록 방문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140301] [청흑] 2인 합작 청흑

 

 

  널어 두었던 청바지를 빨랫대에서 걷고 나서야 어제 세탁기에 여러 옷가지를 한꺼번에 넣어 빨래한 것을 후회했다처음 샀을 때의 치수가 몇이었는지 가늠조차   없을 만큼 잔뜩 늘어난 바지가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펄렁거렸다. 이걸 과연 입을 수는 있을까, 싫증이  나는 그것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만약 어제 네가  집에 있었더라면 잔뜩 뒤엉킨 세탁물들을 세탁기 안에 한꺼번에 집어넣으려 하는 나를 단호하게 말렸었겠지땅에 힘없이 너부러진 청바지를   흘겨보고는 그대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그래말렸겠지분명……. 슬프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일이라고는 높은 천장을 바라보며 맥없이 웃는 것밖에 없었다.

  네가 나를 떠난 지도 어언  달이 지났다  아니 달이 맞나내가 정신이 나가서 그저께 일어난 일을   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아닐까?
  어쨌든 그때의 너와  사이에서 흐르던 기류는 굉장히 살벌했었다여태까지   번도 크게 싸운  없는 사이라곤 믿을  없을 정도로 으르렁대며 다퉜었지

 

 

 


  처음 네가 집을 나가버렸을 때의 나는 그야말로  만난 고기나 다름없었다헤어짐의 슬픔 따위를 느낄 틈은 없었다 시절에는 오직 '놀자!', '즐기자!'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냄새가 싫습니다.'라는 너의 단언으로 인해 마지못해 끊었던 담배를 오래간만에 물어보기도 하고친구를 통해 알게  여러 여자를 품에 끌어안기도 했다. 또 뭘 했었더라. 이것 외에도 저지른 짓들은 끝도 없이 많은데 막상 떠올리려고 하니 어째선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각종 유흥에  빠져 있던 나는 제법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아니사실  따위야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었다현관문을 열고 '다녀왔어.' 말해봤자 반겨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무미건조한 집이 뭐가 좋다고그렇게 하루하루를 바깥에서 살던 내가 집안 사정을  리가 만무했다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큼직한 짐이 없어지든수납장 위에 올려 두었던 갈색 액자 속에  사진이 갈기갈기 찢겨 형체를 알아볼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리든 나로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  사실을 깨달은 것도 고작 얼마 전이었다. 깨진 액자의 유리 조각에 너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붉은 피가 굳어 있었다는 건 그저껜가 그끄저께에 알게 됐고.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애써 모른 척했다

  슬슬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귀찮아졌을 무렵, 나는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자고 가도 상관없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나서 주변 사람들을 텅 빈 집 안으로 잔뜩 불러들였다. 덕분에 고독함으로 가득 차 있던 집 안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고, 그와 동시에 씁쓸하고 어지러운 알코올 냄새가 실내에서 한가득 진동했다. 그렇게 며칠간은 정말 즐거웠다. 평생 이렇게 놀 수 있다면 삶이라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했었다.
  하지만 그 미미한 행복마저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했다. 며칠간의 유희를 계속 즐기던 나의 친구들은 '여자친구 때문에', '너도 피곤하지 않겠냐', 라는 등의 명분을 대고서는 차차 하나둘씩 자신의 터로 돌아갔다. 그렇게 마지막 남아 있던 한 명마저 '다음에 보자.'라는 말과 함께 현관문을 밀고 떠나갔을 때,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혹시나 너로부터 문자 한 통이라도 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종종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곤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다. 모두가 떠나간 지금 내 핸드폰에 쌓이는 거라곤 시답잖은 스팸 문자들밖에 없었다. 씁쓸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참하게 깨진 유리 사이사이에 흩뿌려져 있는 사진 조각들을 수많은 쪼가리 사이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발견한 이후로부터는 뱃속에서부터 무어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부글부글 끓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기 얼굴은 아주 세상에서 없어져도 될 존재라는 듯 갈기갈기 찢어 놨으면서, 어째서 내 얼굴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걸까, 너는

  분노와 후회가 머리끝까지 솟았고, 그렇게 며칠간 또 술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냈다. 만나봤자 별 위로 안 되는 한심한 친구들도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다들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 버렸다

 

  그렇게 반쯤 죽은 삶을 살던 와중, 언제였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딱 한 번 그리움과 슬픔을 담아 너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과연 네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사랑한다'? '미안하다'? '돌아와 줘'? 글쎄. 아직도 잘 모르겠다.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살아는 있는지, 밥은 잘 먹는지. 그런 간단한 안부를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날 떠난 지금은 과연 얼마나 행복한지 궁금했던 건 아닐까. , 그런 잡다한 고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발신 버튼을 꾹 누르고 나서 몇 초 후에 들려오는 소리는 평범한 통화 연결음 이 아니라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그 순간 딱딱한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너의 이름만을 애타게 외쳤다. 이미 잔뜩 늦어 버려 놓고서는

  나는 또다시 폐인이 되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네 흔적이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푹신하다며 네가 좋아하던 소파, 네 입속을 들락날락한 전과가 있는 수저, 너와 함께 밥을 먹던 식탁 등등 내 주변에서 너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은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들에 시선을 맞출 때마다 괴롭게 떠오르는 네 뒷모습. 그래, 너를 떨쳐 버릴 방법 따위가 나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처음 시작은 소소한, 그 어디서든지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말싸움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갈라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만약 내게 과거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잠깐 주어진다면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네가 떠나가기 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는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면서 싹싹 빌겠지. 하지만 슬프게도 옛날의 나는 굉장히 멍청했다. '이렇게 조금 싸우다가 몇 시간 후면 풀리겠지.'라는 오만한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아둔했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공방이 지속되자, 결국 참다 참다 못한 네 입에서는 여태껏 들어본 적도 없는 저주스런 악담들이 한바탕 쏟아져 나왔다. 문장들 사이사이 험한 욕설도 조금씩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내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내세웠고, 그 결과. 너의 증발.  

  다른 수많은 저주 사이에서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한마디가 있다. '정말이지, 당신이라는 사람 더는 봐줄 수가 없어. 앞으로도 평생 그리 살다가 썩어 문드러지면서 고통스럽게 죽어 버리길 바랍니다.'. 그 비참한 말마저 '어차피 곧 풀릴 거면서.'라 시답지 않게 받아친 나를 너는 얼마나 증오하고 있을까?
 

  그로부터 한 20일 정도 지났을 때, 나는 더 이상 네 웃는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떠오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마저 기쁘게 만들어 주던 그 행복한 표정을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마음에 수납장 위에 올려져 있던 액자를 무심결에 찾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설마 너는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너를 갈구하게 될 줄 알고 자신의 기쁜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 건가. 대단한 걸, 네 계획 대 성공이다

  나는 네 체취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소파 위에 털썩 앉아 너와 함께였던 과거를 곰곰이 되새겼다.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그러고 보니 네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 건 과연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처음 동거를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 둘은 굉장히 행복했는데. 신혼부부 못지않은 달콤한 삶을 꿈꾸기도 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그래. 확실히 네가 이 집을 나간 건 어떻게 보면 정말 당연한 일이다. 나 같은 녀석의 장단을 맞춰 주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너에게 저지른 만행들이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죄책감이 잔뜩 물밀려 들었다. 널 비참하게 만들고 결국 떠나보낸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그 쓰디쓴 악결과를 힘들게나마 받아들였다.

  그런 암담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카가미였다. 순간적으로 네가 돌아온 게 아닐까 하는 희망에 입안소리로 '테츠?'라 중얼거렸지만, 반갑게 문을 열어주자마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날아오는 괴팍한 주먹은 절대로 너의 것이 아니었다.  

 

 "미친 자식 같으니라고. 너 여태껏 무슨 짓을 하고 산 거냐?" 

  맞은 뺨의 얼얼함을 달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는 눈을 부릅뜨고 내게 폭언을 내뱉었다. 그리고서는 '너 같은 녀석한테는 인간의 자격도 없다.', '네가 무슨 잘못을 한 건지 감이 오기는 하냐?'라 소리치며 얼떨떨하게 서 있는 나를 향해 계속 주먹을 꽂았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눈알을 부라리며 당장 상대방에게 달려들었겠지만, 그때의 난 그 어느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아니 대관절 자격이 없었다. 카가미의 일침들은 죄다 옳은 내용으로만 가득 차 있었으니까

  이후로도 난 카가미에게 몇 대를 더 맞았고 결국 바닥에 완전히 뻗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그는 '.'하며 혀를 한 번 세게 차고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집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냐?" 

  카가미는 베란다 쪽의 창문을 활짝 열며 나를 향해 구박하듯 소리쳤다. 역겹게 풍겨오던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허공에서 지워짐과 동시에 얼음장같이 찬 공기가 실내로 잔뜩 날아들어 왔다. 이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신선함인가 싶었다. 나는 신발장 앞에 힘없이 드러누운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냥 잠깐만이라도 쉬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주방에서부터 솔솔 풍겨 오는 음식 냄새에 정신이 들었다.  

  내가 눈을 뜬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었다. 싱크대에 가져다 놓기 귀찮다는 이유로 다 먹고 나서도 식탁 위에 계속 올려 두었던 라면 냄비도, 거실 바닥에 멍청하게 벗어 놓은 각종 옷가지도, 조금만 더 쌓으면 조그마한 산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잔뜩 솟아 있던 재떨이 위 담배꽁초들도, 수납장 옆에 고이 모셔 놓았던 깨진 유리와 사진 조각들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가 정녕 내가 살던 장소?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깼냐?" 

  그 와중에 짜증스러운 얼굴을 지은 채 부엌에서 걸어 나오는 카가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잔뜩 피어오르던 여러 망상 속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 그렇구나. 역시 저 녀석이 다 치워버린 거구나

 

 "다음에 왔을 때에도 이렇게 멍청하게 살고 있으면 그땐 진짜로 죽일 테니까." 

  뭘까. '다음에 왔을 때'라는 건 언젠간 또 오겠다는 소리인가.  

  한 일 분 정도 넋이 나가 있던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지금 당장 저 녀석을 붙잡아서 네 안부라도 물어봐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카가미는 이미 현관문을 열고 집을 떠나간 지 오래였다. 굳게 닫힌 현관문만이 내 시야를 막고 있었다

  이번에도 결국 이렇게.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제 나는 스스로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했다. 스스로, 스스로라는 말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카가미가 깨끗하게 청소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워지지 않은 너의 흔적이 집 안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그냥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너에게 집착하며 축생 같은 삶을 살아가다가는 정말 네가 말했던 대로 썩어 문드러지다가 비참하게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건 여담이지만, 어제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핸드폰을 들어 다시 한 번 더 다이얼에 네 번호를 입력해 보았다. 처음 전화를 걸었던 그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내가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잔뜩 떨리는 손가락으로 발신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 너머로 들려 올 소리만을 기다리니,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역시 영락없었다. 잠깐이라도 기대감을 품었던 나 자신이 너무나도 멍청하게 느껴졌기에 힘없이 웃으며 핸드폰을 소파 위로 가볍게 던져 버렸었다

 

  벌써 한 달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네가 떠나기 전, 종종 농담 삼아 말했던 '난 테츠 네가 하루라도 없으면 죽어 버릴지도 몰라!'라는 낯간지러운 문장을 되새겼다. 역시 말은 함부로 내뱉는 게 아니로군. 네가 떠나간 지 하루는커녕 무려 30일이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다. 내가 존재하는 이 장소는 천국이 아닌 바로 우리 집이다. 비록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할지라도 아직 죽지 않았다. 그래,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카가미가 나를 때려 팼던 그 날처럼 나는 누워 있다. 만약 네가 지금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면 과연 너는 내게 무슨 말을 해 줄까. 이제서야 조금 사람처럼 변했는데,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주지는 않을까?  

  실현되지 않을 망상을 가득 펼치며 팔을 눈 위에 얹었

 

 

 

[140131] [쿠로코 테츠야] 쿠로코 생일 축전 합작 글

 

 

 

  130일의 오후 1155.

 

  슬며시 눈을 떠 베개 옆에 놓여 있는 새까만 디지털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꿈나라로 떠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아직 잠이 오질 않습니다. 조금만 버티고 있으면 눈은 알아서 감기겠지, 감기겠지, 했던 게 어느덧 1시간 전부터 이어져 온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역시 저는 들떠 있었던 걸까요, 왠지 시합을 하루 앞둔 카가미 군의 설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아직도 별로 실감은 안 나지만, 곧 현실로 다가올 5분 후는 1월의 끝자락인 31일이자 1년 만에 돌아온 나의 생일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옛날의 저는 생일이라는 기념일을 그다지 중요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지요. 초등학생 때부터 존재감이 없었던 제 생일을 챙겨주는 사람은 가족을 제외하고선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른 연령대보다 유독 질투심이 강하고 별거 아닌 말에도 금방 토라져 버리는 저학년 시절에나 조금 속이 상했을까요. 점점 삶을 알아가고, 다양한 생각이 들쑥날쑥 자라나기 시작한 고학년 무렵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내 생일'이라는 기념일에 관심을 끊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 혹독한 결심이었을까요. 그렇다고 딱히 누군가가 '너 같은 아이에게 생일이라는 날은 있으나 마나니까 그만 잊어버리렴.'하며 강요한 건 아닙니다. 그저 아무도 알려 하지 않고, 기억하지도 못하는 날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라 스스로 늘 생각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기가 태어난 날을 축하받는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해?'하는 서글픈 생각도 더는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에게 131일은 한낱 찬바람 거세게 휘몰아치는 어느 겨울날에 불과했습니다. 그 사실에 '어떻게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지 않을 수가 있지?'라며 딴지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 그래도 마음은 오히려 훨씬 편했습니다.

 

*

 

  그 완고하던 관념을 바꾼 건 아마 중학교 3학년, 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막 지표면을 달구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사실은 그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던 날의 일시는 물론이요 심지어 장소까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딱히 감명 깊은 일이랍시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소중한 비밀 일기장에 털어 놓았다던가 별로 그런 소녀다운 취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년 반이나 지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걸 기억하느냐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저는 이리 대답하겠습니다. 그때는 618, 다름 아닌 같은 농구부원인 키세 군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키세 군은 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오늘 제 생일입니다! 축하해 주십셔!', 하며 널리 광고하지 않더라도 주변인들이 알아서 그의 생일을 챙겨 주곤 하더군요. 그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케이크가 얼굴에 정통으로 꽂히는 등 한바탕 거하게 축하를 받고서야 그는 ', 오늘 제 생일이었슴까?'하며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다가 이어 초등학생 마냥 배시시 웃습니다. 그 미소는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고 있을 중학 3년생 남자아이치고는 굉장히 순수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하늘에 저녁놀이 불그스름히 물들기 시작했을 즈음, 다른 농구부 부원과는 길이 엇갈려 헤어지고 저와 키세 군만 길거리에 남아 나란히 걸으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교 중인 그의 모습은 참말로 '꼴사납다'는 단어 외로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언제나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던 그의 예쁜 금발은 생일 케이크를 귀엽게 장식하고 있던 하얀 생크림으로 잔뜩 범벅되어 기분 나쁠 정도로 질퍽거렸고, 바로 어제 세탁소에서 찾아온 듯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하기만 하던 교복은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위해 일어났던 사소한 다툼무라사키바라 군이 그를 농구부 부실로 포획할 때 발생한 약간의 몸싸움으로 인해 꾸깃꾸깃해진데다가 무슨 점박이 강아지의 까맣고 하얀 털처럼 때가 잔뜩 타 버렸기에 과연 그가 이번 주말까지 저 걸레짝을 입고 다닐 수는 있으련 지가 의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이 굉장히 흉하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와중에도 키세 군은 헤프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나한테 말을 걸더군요.

 

  "이야, 이런 생일 축하 한 번만 더 받았다가는 몸이 남아나질 않겠슴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실소가 픽, 하고 터져 나왔습니다. 학교에서 벌어졌던 무시무시한 일명 '키세 료타 생일 경축 이벤트'를 받고아니 당하고도 화 한번 내지 않는 그가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게 느껴졌기 때문일까요. 본래 성격이 유순해서 그런 건지, 자신을 축하해 준 고마운 친구들을 위해 일부러 분노를 죽이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키세 군은 오늘 하루 동안 단 한 번도 싫은 기색을 내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 물론 가끔씩 '너무햇!'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건 예외로 치고요.

 

  "그래도 키세 군은 좋겠네요. 생일을 기억해 주는 친구가 있잖습니까."

 

  그의 얼굴빛이 제법 좋아 보였기에 별생각 없이 뱉은 한마디였습니다. '좋겠네요.'에 부러움의 의미는 없었을 뿐더러 나에게 '생일을 기억해 주는 친구'가 없다는 이유로 시기심을 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생일을 맞아 행복으로 가득 찬 키세 군을 위한 의례적인 말 중 일부일 뿐이었지요.

 

  ", 그런 가여?"

 

  그는 쑥스러웠던 모양인지 검지를 들어 자신의 뺨을 살짝 긁었습니다. 그러고서는 가볍게 올라가 있던 양 입 꼬리를 좀 더 높게 들어 올려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군요. 그의 머리에 허연 생크림만 묻어 있지 않았더라면 그 웃음이 훨씬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마음 같아서는 손수건으로 닦아 주고 싶었지만 그 모습도 나름대로 멍청해 보이면서 웃겼기에 그냥 저대로 놔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일부러 모른 척했습니다. 만약 그에게 타인의 생각을 읽는 기이한 능력이 있었다면 울상을 지으며 '너무햇, 쿠로콧치!'라는 말과 함께 달려들지 않았을까 싶네요. 키세 군이 능력자가 아닌 평범한 남학생이라 다행이었습니다.

 

  ", 근데 있잖아여 쿠로콧치."

 

  그러던 와중 갑자기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며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그 의문에 가득 찬 또랑또랑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잠깐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수업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는 선생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다만 그 초등학교 1학년을 고개 빳빳이 들어 올려다봐야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요.

 

  "쿠로콧치는 생일이 언젬까?"

  "?"

 

  사실 조금 멈칫하지 않았다면 그건 틀림없이 거짓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키세 군이라면 뒷내용을 들으나 마나 '오늘 제 플레이 어땠슴까?'라던가 '제가 지난번에 촬영을 갔었는데 말이져!'등의 이야깃거리를 꺼낼 줄 알았기 때문이지요. 나에게 그 말은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친우 사이라면 한 번쯤은 오고 갔을 지극히 평범한 물음이었지만, 생일이라는 기념일을 있는 둥 마는 둥 하며 잊고 살아왔던 내겐 굉장히 생소한, 아니 생소의 단계를 떠나 또래를 상대로 처음 받아 보는 질문이었기에 조금 머뭇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일반적인 사람이었더라면 자연스럽게 '제 생일은 몇 월 며칠입니다.'하고 대답했겠지요. 하지만 그 평범한 한마디조차 어색하게 느껴져 고작 입만 뻐끔거리는 내 자신이 너무 갑갑했습니다.

 

  "쿠로콧치?"

  ", …… 그게, 131일입니다."

  "아하."

 

  그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자기 생일도 모르는 멍청이로 낙인찍힐까 봐 급히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키세 군은 흐응, 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요.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던 그 정상적인 반응에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뱉었습니다.

 

  "만난 지가 1년이 넘었는데도 여태까지 계속 모르고 있었네, 정말 미안해여."

 

  그는 허공에서 놀고 있던 손을 교복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음과 동시에 겸연쩍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대답이랍시고 입안소리로 '괜찮습니다.'라 중얼거렸었는데, 키세 군이 과연 들었을는지 모르겠네요. 주머니에서는 그의 손과 함께 흰 핸드폰 하나가 쥐어져 나왔습니다. 키세 군은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살짝 밀어 핸드폰의 잠금을 해제하자마자 갑자기 빠른 속도로 손가락을 놀리며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짜잔!"

 

  그리곤 몇 초나 지났을까, 그는 갑자기 내 안면에다가 액정을 쑥 들이밀었습니다. 뜬금없는 그 행동에 깜짝 놀라 그만 뒤로 나자빠질 뻔했었던 나는 그에게 지금 위험하게 뭐하는 짓이냐며 따지려 했지만, 어느새 잔뜩 밝아져 있는 키세 군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 이게 뭔가요?"

 

  동글동글한 폰트로 '131, 쿠로콧치 생일'이라고 적혀져 있는 핸드폰 메모가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습니다.

  "뭐긴여. 이날 쿠로콧치 생일이라면서여?"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키세 군이 내게 물었습니다.

 

  "전 이렇게 저장을 해야만 기억이 나더라구여. 쿠로콧치 생일 까먹으면 안되잖슴까?"

 

  해맑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 잠시 넋을 잃을 뻔했습니다. 십여 년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을 오늘 한꺼번에 다 들은 것 같다고 표현을 하면 실감이 나려나요?

 

  “131일이라, 그때쯤이면 윈터컵도 끝날 테니까 쿠로콧치 생일 챙겨줄 수 있겠네여!”

 

  갑자기 목 아래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뜨거운 액체와 같은 것이 잔뜩 북받쳐 묘한 감정을 자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키세 군에 대한 감동일까요, 아니면 여태까지 혼자서 품어 왔던 겨울 하룻날에 대한 서러움일까요.

 

  여전히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키세 군의 핸드폰 액정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으니 '내 생일'을 누군가가 물어봐 준다는 것이 이렇게나 설레는 일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여태까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던 내 생일을 키세 군은 매우 자연스럽게 물어봐 주었고, 행여나 잊어버릴까 봐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까지 했습니다. 타인에게는 굉장히 일상적인 일 중 하나겠지요. 친한 친구에게 생일을 물어본 다음 그 날짜를 까먹지 않기 위해 달력에 써 놓는 건 나도 여러 번 해 보았습니다. 물론 오늘 키세 군의 생일에도 동그라미를 쳐 놓았었고요. 하지만 언제나 나는 그런 방식으로 남을 기억하는 입장이었지, 살아오며 단 한 번도 기억되는 입장에 선 적은 없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짝사랑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하지만 바로 오늘, 그 기나긴 15년의 기록이 깨졌습니다. 그는 여차하면 정말로 세상에서 잊힐 뻔했던 쿠로코 테츠야의 131일을 구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키세 군."

  ", 왜여?"

 

  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 속으로 가져가며 밝게 대답했습니다. 키세 군은 자기가 내뱉은 말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아마 꿈에도 모르겠지요.

 

  "감사합니다."

  ", 감사라녀? 갑자기 왜?"

 

  그 ''라는 질문에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이 들뜬 감정을 계속 혼자 안은 채로 끝까지 가져가고 싶었거든요.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글쎄요. 사실 조금 쑥스러웠던 걸지도 모릅니다. , 그 덕분에 하교하는 내내 키세 군에게 계속 '치사해욧!'소리를 들으며 달달 볶여야 했지만요.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검은 펜을 쥔 채 달력을 펼쳐 들어 아무런 날도 아니란 듯이 텅 비어 있던 131일에 큼직한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던 기억이 납니다.

 

*

 

  그리고 그렇게 고대하던 중학교 3학년 쿠로코 테츠야의 생일은 테이코 중학교 전국 대회 3연패, 윈터컵 종료와 함께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

 

  "."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을 하던 사이에 디지털시계의 삐삐, 삐삐.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요란스레 울렸습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날이 왔습니다. 결국에는 다시 돌아온 131, 내 생일.

디지털시계 특유의 그 알람은 왠지 계속 듣고 있으면 당장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건 생각만 해도 짜증나는 일이었기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손을 놀려 시계 윗부분에 나 있는 작은 버튼을 꾹 눌렀습니다. 그와 동시에 듣기 싫었던 기계음은 뚝 끊기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12시를 맞았으니 이제 슬슬 자야겠지요. 나는 이불 끝자락을 잡고 내 얼굴 쪽으로 쭉 끌어당겼습니다.

  띠딩!

  하지만 이번에는 영 다른 쪽에서 기계 소리가 들리더군요. 이건 또 뭔가 싶어 나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알림 음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습니다. 그 소리의 근원은 다름 아닌 서랍장 위에 놓여 있던 내 핸드폰이었습니다. 핸드폰…… 이 늦은 시간에 왜 핸드폰이 울리는 걸까요. 누군지는 몰라도 밤중에 메시지나 보내고 있다니, 참 예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확인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 알림을 무시한 채 다시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훈련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기억해 냈거든요. 또 그 지옥 메뉴인걸까요, 탄식 섞인 한숨을 짧게 내뱉고 나서 스르르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자 작년의 그가 내게 해 주었던 말이 불현듯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쿠로콧치 생일 챙겨줄 수 있겠네여!'

 

  …….

  혹시?

  나는 반사적으로 내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찬 다음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서랍장 위에서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집었습니다. 지금 오고 있는 저 수많은 연락, 그중 하나가 혹시 키세 군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비록 그가 말했던 '윈터컵이 끝났을 때'가 지금은 아니었지만, 내 생일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오직 키세 군밖에 없을 테니까요. 아릿하게 쿵쾅거리는 가슴은 이미 진정 불가였습니다. 떨리는 엄지손가락을 핸드폰 액정에 가져다 댄 다음 옆으로 살짝 밀자마자 통신사에서 기본적으로 깔아 주는 밋밋한 바탕 화면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핸드폰은 '띠딩!'하며 자꾸 울리더군요.

  키세 군, 정말로 당신인가요. 메시지 수신함 아이콘을 누르고 나서 화면이 뜨기만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이 내게는 마치 초고속 카메라의 슬로 모션과도 같았습니다.

막상 1초도 지나지 않아 수신함에 저장된 몇몇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엄습해오는 긴장감과 떨림에 입속에 한가득 고여 있던 침을 꿀꺽 삼킨 다음 가장 마지막에 온 메시지부터 차례대로 찬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 생일축하해! 생일빵 때릴 거니까 오늘 하루는 미스디렉션 할 생각 않는 게 좋을걸!'

  '오늘 네 생일이지? 축하한다 쿠로코'

  '쿠로코 생일 축하! 오늘 학교에서 보자!'

  '자냐? 생일 축하한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애정하는 쿠로코 생일 축하합니다'

  '쿠로코 생일이라면서? 축하축하!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길 바랄게! , 물론 연습 빠질 생각은 하지 말고^-^'

 

  6통 전부 세이린 농구부원들의 축하 문자였습니다.

 

  아, 맞아요. 하긴 키세 군과 나는 이제 같은 팀이 아니니 그가 내 생일을 기억해 줄 리 없지요. 잠시나마 헛된 기대를 품었던 내가 너무 바보 천치같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멍청하고 단순한 키세 군이라 해도, 한때 그 누구보다 친했던 동료였다곤 해도 어차피 지금은 서로가 적대 관계인데 일부러 잠도 설치면서까지 적의 생일을 축하할 리가 없잖습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요동치던 심장은 어느새 쥐 죽은 듯 고요해졌고, 파르르 진동하던 손도 자기가 언제 떨었느냐는 듯 매우 멀쩡했습니다.

  키세 군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렇게나 실망하다니, 나 정말 최악이네요. 세이린으로 진학을 결정함과 동시에 키세 군에 대한 마음도 깔끔히 접은 줄 알았었는데, 지금 내 상태를 보고 있으니 꼭 그렇지도 못했나 봅니다. 억제하면 억제할수록 도리어 미련만 잔뜩 쌓여 가잖아요.

  핸드폰 액정을 눈에 가져다 대고 세이린 부원들에게서 온 문자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습니다. 축하해, 축하. 축하한다……. 하나하나 따뜻한 축하 말에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이렇게나 다정한 동료들을 가까이 두고서는 먼 곳의 키세 군만을 찾아 헤맸던 내 자신이 굉장히 부끄러워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순수하게 기뻤습니다.

  가장 처음에 온 감독의 문자에 답장하기 위해 메시지 입력 버튼을 눌렀습니다. 화면 아랫부분에 미니 키보드가 나타났고, 나는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장을 치기 위해 ''버튼이 있는 쪽으로 엄지손가락을 뻗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띠딩!

  다시는 울리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그 명랑한 문자 알림 음에 그만 숨이 멎을 뻔했습니다. 나아가던 엄지손가락은 신호에 걸린 자동차처럼 허공에 우뚝 멈춰 섰습니다. '새로운 메시지 1, 확인할까요?'라는 문구의 알림창만이 핸드폰 가운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이 문자도 키세 군이 아닐 거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고 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설레는 걸까요. 조금 전에 죽어 버린 줄만 알았던 그 박동은 어느새 다시 살아나 가슴 속에서 미친 듯이 북을 쳐대고 있었습니다. 이게 정말로 키세 군이라면?

  여기서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정말로 심장이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확인'버튼을 꾹 눌렀습니다.

 

 

  '쿠로콧치'

 

  하얀 바탕과 함께 화면에 떠오른 그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딱딱한 물건에 머리를 세게 가격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를 '쿠로콧치'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명, 키세 군밖에 없으니까요. 말로는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면서도 내심 그이길 바라고 있다가 내용을 보고서는 얼마나 놀랐는지 순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줄 알았습니다. 혹시 누군가가 장난을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히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니, ''한 글자, ''두 글자, ''. ……역시나 그입니다.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기뻤습니다. 뺨은 붉게 타오르다 못해 문구점에서 파는 500원짜리 손난로 못지않게 뜨끈뜨끈해졌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그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지요. 고작 쿠로콧치라는 부름 하나에 이렇게나 기뻐하고 있는 내가 우스우면서도 조금 한심했습니다.

 

  과연 어떤 답장을 보내야 좋을지 몇 분 동안 계속 고민만 하다가 결국 '.' 한 글자만을 보내 버렸습니다. 혹시나 이 이후로 그로부터 문자가 안 오면 어떡하지, 설마 짧게 보냈다고 토라지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혀로 입술을 핥으며 초조하게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가, 다시 잠갔다가를 끊임없이 반복했습니다. 다행히도 내가 문자를 보낸 지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띠딩!'하는 알림 음이 방 안을 울리더군요.

 

  '잠깐 나와 주지 않겠슴까? 집 앞이 에여.'

 

  순간 내 눈을 의심했습니다. 지금? 오후도 아닌, 오전 12시가 넘은 지금 이 시각에 우리 집 앞?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어 그 문자 메시지를 받은 후 멍하니 핸드폰 화면만 쳐다보고 있다가 곧바로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침대 옆에 나 있는 사각 창문으로 다가간 다음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한밤중의 새까만 어둠 속이었지만 다른 것에 비해 유달리 눈에 띄는 키세 군을 찾아내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바람 쌩쌩 부는 이 한겨울에 춥지도 않은 모양인지 외투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미련하게 우뚝 서 있는 그 남자는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맞았습니다. 누가 모델 아니랄까 봐 위에서 내려 봐도 멋있는 그의 모습에 당장에라도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풋, 하고 터져 나왔습니다. 정말이지, 아무리 성인 못지않은 체격과 외모를 가지고 있다지만 속은 아직 고등학생인 주제에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바깥을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키세 군의 기분이 어찌 되건 '미쳤습니까'라던가, '가족들이 다 자고 있어서 곤란합니다'등등 굉장히 까칠한 어투로 답장을 보냈겠지요.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을 생각입니다. 더는 망설일 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려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라는 말을 그에게 보내기 위하여 메시지 입력 칸을 터치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또 새로운 문자 한 통이 전송되어 오더군요. 이걸로 지금 몇 번째 울리고 있는지 모를 문자 알림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참 성격도 급하다니까요. 이번에도 나는 주저하지 않고 '확인'버튼을 터치하여 수신된 메시지의 내용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작년처럼 사라지지 말아 주세여'

 

  그 짧은 문자 한 통에 담긴 키세 군의 진심이 액정 바깥으로 묻어 나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음, 혹시 키세 군이 문자 메시지에 눈물을 나오게 하는 약을 발라 보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갑작스레 찡해져 오는 코끝은 마치 전기가 지나간 듯했습니다. 또렷하게 잘 보이기만 하던 문자 메시지의 까만 글자가 멀겋게 흐려 뵈는 이유가 뭘까요. 가볍게 웃고 있는 얼굴과 반대로 자꾸만 시큼시큼하게 아파 오는 가슴에는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요. 고작 글자의 나열에 불과한 그 한 문장이 어찌나 내 마음속으로 생생하게 다가오던지 마치 키세 군이 내 옆에 잠깐 동안 앉아 있다가 문자를 읽어 주고 간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한 번 읽고 또 읽고, 메시지의 글자가 머릿속에 콕콕 박힐 때마다 뱃속에서 무언가가 잔뜩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따끈한 눈물 한 방울이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개진 뺨 위를 타고 흘렀습니다. 키세 군의 연락에 기뻐서 나오는 눈물인지, 외로웠던 작년의 서러움에서부터 나오는 눈물인지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지금이라도 울지 않으면 갑갑해서 못 살 것 같은 오묘한 기분이 느닷없이 들었을 뿐입니다. 갑자기 '사라지지 말아 주세여'라니, 이거 반칙 아닙니까. 내려가자마자 한소리 해 줘야겠어요. '설마 내가 키세 군을 떠날 만큼 멍청한 사람으로 보였나요?'하고요.

  ……이제 뭐가 어찌 되든 좋아요. 잠옷 소매로 눈가를 한 번 비빈 다음 나도 모르는 새 침대 위에 떨어뜨렸던 핸드폰을 다시 집었습니다. 그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답장을 작성해 나갔습니다. 아까 쓰려다 말았던 '내려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나갈 때 입으려고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겨울용 외투를 한 손으로 쭉 잡아당기고 빠른 속도로 몸에 걸쳤습니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모두가 자고 있어 고요함만이 가득한 집 안의 침묵을 떠들썩한 발소리로 깨뜨리며 최대한 빨리 현관으로 달렸습니다. 생일을 맞은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한밤부터 이렇게 요란 법석을 떨며 소동이니, 이번 생일은 또 얼마나 즐거울지 상상조차 안 되네요. 여러 가지 의미로.

  만약 오늘 아침에 늦잠 자기만 해 봐요, 다 키세 군 탓으로 돌릴 테니.

'WRITE > 黒子のバスケ'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0301] [청흑] 2인 합작 청흑  (0) 2014.05.04
prev 1 2 3 4 ··· 7 next